연세대 김학철 교수
사람이 한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는건 종교적 감수성이 아니라 우리 기억이란게 연관된 생각을 하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에서 무언가 느끼는건 초월적인것을 추구한다거나 하는게 아닌 그 음악에 대한 기억이나 새로움을 비교하려고 뇌가 저절로 반응하는 패턴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음악은 새들도 어느정도 한다. 노래부르는 새들이 있으니까. 나도 어떤 초월적인 것을 향수하기는 한다. 신비로운 것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에게. 어쩌면 교수님의 말씀은 신비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다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질수도 있겠다. 믿는 사람들은 자연에서 우주의 질서가 아닌 신을 생각한다. 느낀다라고 표현했는데 이건 마치 본능적인것이라는 어감이 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도 꽃을 보며 사랑을 느낄 수 있고 꼭 신을 느끼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초월로 이어지진 않는 것이다. 사랑이 초월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분명 하나님을 믿는데에는 신비함은 큰 작용을 한다. 나는 사실 신비함을 좋아해서 신이란 존재가 있기를 바라는 맘도 적지 않다. 그래서 동시에 마녀가 있기를 바라기도 한 사람이다. 착한 마녀.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마녀가 되고 싶다. 악마의 힘을 빌리는게 아닌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 마녀가 되고 싶다. 어쨌거나 나는 하나님은 믿는다. 나같은 경우엔 하나님의 신비로움도 느끼긴 하지만 그건 어릴때 주로 그러했고 현재는 삶의 어려움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에 거의 믿는것이라 생각된다. 어떤 과학자는 종교는 박약한 사람들이 믿는거라 했는데 그 말도 맞는게 나같 이 나약한 사람은 종교가 없으면 벌써 죽어서 사라졌을거라 생각된다. 나는 너무나 나약해서 하나님이든 뭐든 선한 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죽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아,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했긴 하다. 그러나 거의 진실이다. 요즘은 자주, 더 이상은 하나님이고 뭐고 다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신비로움은 사실 고통 앞에서 사라져버리기 일쑤다.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신비는 위안은 되긴 하지만 잠깐 뿐이다. 절규와 헐벗음 외로움과 무력감 앞에서는 하나님이 나타나 주시질 않는다. 차가운 현실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배신감 마저 느껴질 정도다. 새들은 그렇게 먹이면서 왜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굶어 죽는 것인가. 왜 얼어죽는 노숙인이 있는 것인가. 왜 노인들은 고독사 하는 것인가. 특히 고독사. 오랜시간 견뎠을 그 외로움. 너무나 잔혹하다. 아프리카 아이들. 그 아이들이 우리와 다른게 무엇이 있는가. 똑같지 않나. 똑같은 죄인이긴 하지만 똑같은 인간이다. 왜 그 아이들은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은것인가.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다. 나는 지옥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 지옥에 대해서 누가 알려주길(꿈에서) "이곳은 희망이 없는 곳, 하나님이 돌보지 않는 곳" 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지옥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 의식을 행했다.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에게 자비를 불렀다. 하나님이 보지 않아도 그들은 노래를 불러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지만 용서의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긴 행렬의 사람들의 표정은 진실로 이미 늦어버려 되돌릴수 없어 꿈이 없는 자들의 표정이었다. 그 지옥꿈이 너무 생생했기에 이 땅은 지옥이 아닌건 분명 알것 같다. 내가 꾸었던 지옥과는 다르게 아직 희망이 있는 곳이니까. 그러나 무언가. 이곳도 이미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질때가 많다. 난 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철통같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매일 기도드렸다. 모태신앙이라서 그게 습관이다. 간절하게 겸허하게 기도드렸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건 교만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루어진게 거의 없다. 오히려 나빠진게 90프로다.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기도 하면 더 나빠지는게 거의 90프로인 사람이다. 그래서 기도를 겁내기도 한다. 어쨌거나 내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엔 고통이 훨씬 더 많고 부처같은 경우엔 생즉고라 할만큼 그냥 살아있는것 자체가 고통이기도 하며 어떤 철학자는 살아있는 것 보다 자살이 이득이라 결론 내리고 그날 자살하기도 하는등 삶은 행복보다 고통이 훨씬 가득한데 그 고통 앞에선 하나님의 신비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위안은 되긴 하다. 그러나 고통이 계속 되는 한 신비는 대부분의 사람에겐 그저 위안일 뿐이다. (만약 신비가 큰 위안이 되는 사람이라면 그 분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자로서 천국이 그의 것임이라한 말씀이 임할것이다.)
이러한데 하나님을 나는 여전히 믿는 이유는 분명 내가 나약한 사람이라서 별다른 수가 없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어느날 문득 생각이 들었는데 이 무의미하고 쓸데 없는 고통 중에서 내가 아직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의리와 비슷한 것이 생겨버려서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사이가 최악에 가깝더라도 의리로 믿는 것이다. 일관된 무시, 그리고 시련. 기도는 드리면 더 상황이 나빠지게 하는 그런 서로 나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의리로 믿었다. 그런데 이 의리가, 알고보니 결국은 하나님과 더 긴밀해지게 만드는 끈이 되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강하게 만드는, 사랑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빅픽쳐였달까. 나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만이 아닌, 인생에서 신비를 느끼고 즐거워 하는 순진한 어린아이같은 사람만이 아닌 나 또한 하나님에게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 길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영혼대 영혼으로서의 유대감 같은것을 느끼게 됬달까. 이 유대감은 정말 지독하게 빅픽쳐가 아닌가요? 할만큼 돌고 돌아 얻은 유대감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얻는 유대감일지도 모르지만 나로선 힘든 과정이었다. (한숨)
그러나 여전히 고통은 이런 감동 또한 앗아가서 나는 곧잘 우울함에 빠지곤 한다. 나는 나약하다. 그러나 신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닌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중 하나다. 보통 뭔가 이득이 있어서 하나님을 믿을거란 시각이 많지 않았나. 그리고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그제서야 이해하게 되고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을 왜 믿는가 하고 비신자들이 묻는다면, 하나님의 신비보다도 사람의 고통에 대해 깊이 있는 대답을 해주고 싶다. 이 세상의 악에 대해, 슬픔에 대해. 부조리함에 대해. 저주받고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 이 문제들은 분명 대중적이여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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