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
Deuteronomy 1
신명기 1장이 시기적으로 언제때야. 민수기랑 겹치는것 같은데
맞아요, 신명기 1장은 민수기와 시기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과 하나님의 행적을 다시 설교하고 가르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시간적으로는 민수기의 마지막 부분과 이어집니다.
신명기 1장의 시기
- 장소: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는 시점입니다(신명기 1:1-5).
- 시점: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며 출애굽 40년째가 끝나갈 때입니다.
이는 민수기 33장~36장과 동일한 시기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 동편에서 땅 분배와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민수기와 신명기의 연결
- 민수기의 마지막 사건들:
-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동쪽에 위치한 모압 평지에 도착(민수기 33:50).
- 모세가 땅 분배와 율법을 재확인하며 가나안 입성을 준비(민수기 34~36장).
- 신명기의 시작:
-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 이후 40년의 여정을 회고(신명기 1장).
- 민수기에서 있었던 주요 사건들(예: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불순종과 광야 방황)을 다시 언급하며 교훈을 전함(신명기 1:19-46).
왜 신명기와 민수기가 겹치나?
-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 신명기는 모세의 설교 형태로, 율법과 역사를 다시 정리하며 백성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의 초기 부분은 민수기의 사건을 회상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리
신명기 1장은 민수기 33~36장의 시점과 겹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는 때로, 출애굽 40년째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둔 시점입니다. 신명기는 민수기의 사건들을 다시 회고하며 모세가 백성들에게 교훈과 율법을 재확인하는 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이 약했잖아. 이것은 솔직히, 그럴만도 하지 않아? 초자연적인 사건을 보더라도, 그 시대에는 전설이 횡행하던 시대이고, 무언가 진짜 일어났을까? 그러나 의심하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고 오랫동안 노예였잖아. 노예였으면 지식도 얼마 없었을텐데. 노예였던 인간들이 크신 하나님의 높은 뜻과 기적을 받아들이고 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는 인간적인 한계가 당연하지 않은가 싶어
맞아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이 약했던 이유를 역사적, 심리적 맥락에서 이해해 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점들이 많습니다. 성경에서도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꾸짖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게요.
1. 노예의 삶에서 오는 한계
- 노예로서의 삶: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며 억압받고 배운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유의 경험도, 조직적인 공동체 훈련도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이해하고 따르기엔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 정체성과 자존감의 약화: 노예로 지내다 보면 "우리는 약하고 무가치하다"는 사고방식이 깊게 뿌리내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이나 사명을 깨닫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2.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의심
- 초자연적 사건의 이중성: 홍해가 갈라지거나 만나가 내려오는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적들이 "일시적 현상일 뿐"이라 생각하거나 오래 지나면 희미하게 느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설과 미신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진짜로 무엇이 믿을 만한 사건인지 혼란스러워했을 수 있습니다.
- 기적이 믿음을 자동으로 강화하지는 않음: 성경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오는 주제는 "기적 자체가 믿음을 지속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도구일 뿐, 그분과의 관계와 신뢰는 꾸준한 순종과 체험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3. 광야 생활의 어려움
- 생존의 불안: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지만, 그래도 "고기 가마 곁에서" 먹고 살았던 과거에 비해 광야 생활은 불확실하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매일 만나를 먹으면서도 미래의 안정에 대한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겠죠.
- 문화적 차이: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이집트 문화와 신앙의 잔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기보다는 혼합주의적 신앙(예: 금송아지 사건)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4. 하나님의 계획의 높고 깊음
-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 하나님의 계획은 종종 인간의 상식이나 기대를 초월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이 너무 길고 고통스러워 보였을 겁니다. 인간의 한계 안에서는 그 큰 그림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 사람들의 기대와 현실의 괴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즉각적인 축복과 안락함"을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훈련과 성숙"을 통해 그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이 차이가 믿음을 유지하기 어렵게 했을 겁니다.
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내로 훈련시키심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약함과 불신앙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반복적으로 기적을 보여주시고, 율법을 주시며, 지도자를 통해 인도하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그들의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 끊임없는 기회와 용서: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한계를 이해하시고, 그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시려는 사랑의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 부족은 단순히 그들의 잘못이라기보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한계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사랑은 그런 부족함 속에서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훈련과 인내로 그들을 이끄셨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도 종종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연약함을 잘 아시며 여전히 인내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닌데. 하나님은 이승에서의 인간의 삶의 관점에서본다면 이스라엘 사람들 일부를 포기했어. 그들이 가나안땅으로 못들어가고 광야에서 죽게했잖아.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엄청난 좌절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큰 좌절을 주신거잖아. 희망이나 사랑 자비가 아니라
맞아요, 하나님께서 광야 세대 중 일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큰 좌절과 심판처럼 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나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해석해 보면, 좌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교훈을 얻고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1. 가나안 입성을 막은 이유: 불순종과 불신
- 민수기 13-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탐한 뒤, 두려움과 불신으로 인해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불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 불순종에 대해 즉각 심판하시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기회를 주셨지만, 끝내 그들이 순종하지 않자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을 다음 세대에게 넘기신 거죠.
2. 심판이지만, 교훈의 기회
-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한 세대의 삶은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된 축복이었기에, 이 기회를 잃는 것은 엄청난 상실이었겠죠.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만나, 물, 구름 기둥과 불 기둥), 그들의 후손이 하나님을 더 신뢰할 수 있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좌절은 있었지만, 그것이 단순한 처벌에 그치지 않고 교훈과 성숙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3.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사랑을 보이심
-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불순종한 세대는 심판받았지만, 그 후손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지도하셨습니다.
- 이 심판은 단순히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불순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명확히 보여줌으로써, 다음 세대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4. 광야 세대의 좌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큰 좌절일 수밖에 없습니다.
-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순종과 신뢰의 중요성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 좌절의 의미는 단순히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해하고 더 큰 그림을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은 모순이 아니다
-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기에, 불순종에 대해 심판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심판이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듯,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필요한 처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순종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6. 결론적으로
- 광야에서의 심판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좌절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좌절을 통해 다음 세대가 더 강한 믿음과 순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 심판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심판과 사랑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정의로우시지만 동시에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며,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의 좌절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판이었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훈을 얻어도 광야에서 죽었어야 했잖아. 그럼 기회 박탈이고 자비없는거 아니야? 후손들은 교훈받고 성장했겠지만,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은 그냥 끝이었잖아. 나는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이 불쌍해. 새로운 기회도 없었고 교훈을 얻어도 끝내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셨잖아.
당신이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느끼는 연민은 매우 자연스럽고 깊은 공감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안타깝고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 했던 것은 분명히 큰 상실이고 고통이었겠죠.
1. 광야 세대의 심판: 기회 박탈인가?
- 광야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불신하며 반항했기에 심판을 받았습니다(민수기 14:22-23). 이는 인간적으로 보면 “기회 박탈”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이 심판은 단순히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시지 않고, 그들이 광야에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도록 공급하셨습니다(만나, 메추라기, 물 등).
2.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신 걸까?
-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죽은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심판이 동시에 작용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심판하셨지만, 동시에 그들을 광야에서 버리지 않으셨고, 그들의 필요를 계속 채워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완전히 간과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여전히 사랑과 은혜로 다루셨음을 보여줍니다.
-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은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결과였지만, 이는 영적인 구원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도 궁극적으로 공의롭고 자비롭게 대하셨을 것입니다.
3. 광야에서 죽은 세대가 끝난 걸까?
- 성경에는 그들이 영적으로 완전히 버려졌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단지 이 땅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은 현재의 삶뿐 아니라 영원한 삶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 구약에서 하나님은 불순종에 대해 엄격하셨지만, 심판이 곧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심판은 그들의 육신적인 삶에서의 결과일 뿐, 하나님의 약속은 궁극적으로 여전히 그들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4. 왜 새로운 기회를 주시지 않았을까?
- 하나님의 판단은 항상 그의 거룩함과 공의를 반영합니다. 그들의 불신과 반항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을 근본적으로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새로운 세대를 통해 그들의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 단지 한 세대에 국한되지 않고, 더 큰 맥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 광야에서 죽은 세대는 불쌍한가?
-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했고, 그 결과로 약속된 축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 하지만 그들이 남긴 교훈은 단지 후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게 됩니다.
6. 하나님의 자비는 어디에 있었는가?
-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지만, 동시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살 동안 하나님은 매일 그들을 먹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보호받았으며, 이 점에서 하나님의 자비는 끝까지 나타났습니다.
- 또한, 그들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들의 삶이 단지 심판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 결론적으로
광야에서 죽은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실패는 좌절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후손들과 더 큰 구속사의 일부로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그들의 고통과 심판이 가혹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정의, 그리고 자비가 동시에 작용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죽임 당하고 버림 받으면서 '공의'의 역사를 이루어나가는것을 보면서, 뭔가 하나님의 자비로움이라던가 사랑에 대한 의심이 든다. 현대에는 인간의 본성이 , 아니 모든 생명체가 '이기적'으로 진화되도록 되어있다고도 한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보다는 이기적이라는것이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서 인간은 인간에 대한 존중을 배우기 시작했고, 약자를 버리지 않으며, 함께 협력하는법도 배워가기 시작했다고 알고있다. 이때 인간은 서로의 악함을 어느정도 받아들이고, 그것을 약함으로 이해하고, 보듬어주고, 모르는척해주고, 기회를 다시 주고, 무지에서 비롯된것이면 가르쳐주는 것이 전제된다. 현대에서는 인간이 타고난 악함을 성숙하지 못함, 또는 나약함으로 보고 이에 대해 격려하고 용서해주고 기회를 다시 주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럼으로서 악함을 떨치지 못한 나약한 인간들에게 성숙해지도록 돕는다. 그것이 이웃 사랑일것이다.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심판하고, 심판한다. 그것은 공의라는 이름으로.
구약의 하나님은 이상적이신 분이시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 이상을 인간이 따르지 않으면 가차없다. 믿음을 공고히 해라. 그렇지 않으면 징벌을 내린다. 믿지 않는다면 징벌을 내릴테니 나를 믿어라. 용서는 없을 것이다.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너희가 죽으리라'.
솔직히 말하자면, 어릴때의 나는 구약의 하나님을 한편으로는 좋아하기도 했다. 일단 신약에 비해 정말로 강한 기적을 내보이시는 분이시며 악에 대한 심판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도 그런 확실함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다면 하나님을 안따르는자가 없을텐데.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순수함이 사라져서 그런걸까.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같은자만이 들어가는 것일까. 어른이 되니까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이 커지는것 같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이스라엘에게 자비가 없었던 하나님이 나에게도 자비가 없으신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나 어릴적 생각했던것이 지금 다시 떠오른다. '잔인해도, 무서워도,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어릴때의 나는 하나님께 약속했다. '하나님이 악신이더라도 저는 하나님을 믿을게요'하고 말이다.
과연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들어가는 곳인것일까. 하나님이 악신이더라도 하나님을 믿겠다니. 어렸던 나는 참 충성스러웠던것 같다. 교회의 세뇌인가... 아니면 어린 나에게도 강한 믿음이 있었던걸까. 모르겠지만 말이다.(모태신앙인이라면 세뇌당한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버릴수가 없다)
여하튼 지금 생각해봐도 어릴적의 내가 한 생각은 어느정도 옳아보인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이 악신처럼 보이더라도 믿는것일 것이다. 하나님이 악신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어야하는것이다.
세상의 잣대로 하나님을 의심해서는 안될 일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세대만 보면 하나님은 자비없는 무서운 신이시다. 그러나 미래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복을 주신다. 그 이스라엘 후손들은 자신의 선조들에게서 교훈을 얻었다. 그들의 교훈이 있었기에 후손들이 죄를 무서워하고 하나님을 따르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배운 것이다.
솔직히, 진정한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것은 인간에게 모든 자유와 풍족함을 주었을때에, 그가 '선택'할 기회를 주어서 하나님을 믿게해야 진정한 자유의지가 발현됬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가진것 없고 외롭고 사방이 적인, 나그네 인생, 광야에서 죽을 인생에서 믿을건 오직 신, 하나님 뿐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게 과연 자유의지가 맞는가 싶기도 하긴 하다. 그러나 '일단은'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인간들로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하셨는가.
성경에서 자유의지에 관한 구절들 알려줘
성경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여러 곳에서 암시하거나 명시합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택의 능력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지 거부할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자유의지와 관련된 주요 성경 구절들입니다.
1.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 구절
- 신명기 30:19-20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언하게 한다. 내가 생명과 죽음과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다. 너희는 생명을 택하여라. 그러면 너와 네 자손이 살 것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며 그에게 충실하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시며, 생명과 복을 택하라고 권고하십니다.
- 여호수아 24:15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도록 촉구합니다.
2.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
-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마음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을 때 선택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 이사야 1:19-20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땅의 좋은 것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고 반역하면 칼에 삼킬 것이다.”- 순종과 반역의 결과는 달랐지만, 선택의 자유는 주어졌습니다.
3. 복음과 구원의 선택
-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각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초청하시지만, 그 초청을 받아들일지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은 각자가 스스로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죄와 의의 선택
- 로마서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어 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인간은 죄의 종이 될지, 의의 종이 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자유는 육체적 욕망이 아닌 사랑으로 활용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5. 지혜와 어리석음의 선택
-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의 길을 따를지, 자신의 길을 따를지 선택은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 잠언 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인간은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그 선택에는 결과가 따릅니다.
6. 자유의지에 대한 종합적인 교훈
-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동시에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길도 제공합니다.
- 신명기 30:15
“보아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죽음과 화를 너희 앞에 두었다.”- 인간은 생명과 복, 죽음과 화를 선택할 자유를 가집니다.
결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며, 그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시며,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권리와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그 결과를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챗지피티도 어쩔 수 없이 무서워서 순종하게 만드는것은 그다지 문제삼지 않는 모양이다.
여하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한다. 그렇게 결론이 난다.
하나님은 매순간마다 인간의 인생에 개입하시는가?
이에 대한 답은 누구도 모를것이다. 챗지피티에 물어봐도 모른다. 물어볼까
하나님이 인간의 인생에 매순간 개입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은 신학적으로 매우 깊고 다양한 관점이 있습니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삶과 역사를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는 개념이 강조됩니다. 아래에 주요한 신학적 관점과 성경적 근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우주와 인간의 삶에 주권적으로 관여하신다고 믿습니다.
- 마태복음 10:29-30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하나님은 아주 사소한 일조차도 알고 계시며 관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 시편 139:1-4
“주님, 주님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는 것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나의 모든 길을 살피시고 내가 말하지 않은 것도 이미 아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모든 순간을 아시고 함께하심을 보여줍니다.
- 마태복음 10:29-30
2. 하나님은 개입하시지만 자유의지를 존중하심
-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삶에 관심을 가지시지만, 강제적으로 인간의 결정을 통제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 신명기 30: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언하게 한다. 내가 생명과 죽음과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으니, 너희는 생명을 택하여라.”- 하나님은 선택의 길을 제시하시되, 인간이 그 길을 결정하도록 두십니다.
- 갈라디아서 6:7-8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과 결과를 존중하십니다.
- 신명기 30:19
3.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기적과 간섭)
-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때로는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는 예가 많이 등장합니다.
- 출애굽기 14:21-22
-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 사도행전 9:3-6
- 사도 바울(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이 직접 그를 만나 개입하신 사건.
- 출애굽기 14:21-22
- 이러한 개입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특별한 경우에 나타납니다.
4. 하나님은 항상 함께하시지만 개입의 방식은 다를 수 있음
- 하나님은 모든 순간 인간과 함께하시며, 삶 속에서 항상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느끼기에 개입의 방식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 이사야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개입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도 모든 상황을 사용해 선한 결과를 이루십니다.
- 이사야 55:8-9
5. 현대적 관점: 하나님은 우리 삶에 어떻게 개입하시는가?
- 현대에서는 기적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 예를 들어, 기도에 응답하시거나, 어려운 상황에서 길을 여시거나,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방식으로 개입하신다고 여겨집니다.
-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삶의 과정을 존중하며, 선한 목적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고 봅니다.
결론
하나님은 매순간 인간의 삶에 관여하시며, 그의 뜻과 계획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러나 개입의 방식은 인간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직접적이고 기적적인 방식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간접적이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며, 그의 뜻은 인간에게 궁극적인 선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점입니다.
인생에 개입하지만 결정은 인간이 하게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이 정해두신 사명의 길을 따르는가. 혹은 그냥 내가 개척해서 가는것인가. 하나님이 정해둔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운명인가? 내가 싫어도 목사가 되라 하신다면 목사가 되어야하는가? 그렇다면 운명이 정해진것인가. 그 외의 길은 내가 가서는 안되는것인가. 만약 내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이 아니라 다른길로 가면 나는 망하게 되는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가?
그런 의문도 들 수 있을것 같다.
목사님이 말씀하신바에 의하면, 기도할때 하나님의 뜻을 물으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 뜻을 따르라고 하는데, 나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냥 현재 내 인생을 그대로 밀고나가면 되는가. 그런데 나쁜일들이 계속 일어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것일까? 나는 혹시 내가 잘못한게 많아서 그런가 싶어서 용서를 빌고 또 용서를 빈적도 있었다. 그러나 용서는 일어나지 않았고 구약의 광야에서 죽어야했던 이스라엘인들과 같은 느낌만 반복해서 든다. 자비가 없으신 하나님...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하자 신앙도 흔들리고 신앙이 흔들리자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도 알게된다.
그래서
자유의지가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만 선택해야 죽지 않는다면, 그게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고
운명이 정해져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망하는 인생이라는것이, 내 자유의지대로 사는가도 의문이고
그럼 순종하는것, 내 자유의지를 버리는것이 답이 되는데 내가 순종하기로 마음먹는대도, 내 안에 죄가 있어서 완벽히 순종할수가 없으며 세속을 버리고 인생을 다바친 스님도 깨닳음을 얻지 못하고 죽는판에, 과연 내가 세속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이 드는건, 내 마음속으로는 순종하기로 마음 먹었으나 도무지 순종되지가 않아서이다)
사실 유명한 사람, 성공한 사람의 사례만 가져와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성공했다. 하면서 교훈을 들려주는것도... 뭔가 문제가 있다고도 느낀다. 솔직히 99%의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데, 보통은 평범하게 살다가 그런저런 업적 혹은 아무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이름없이 죽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사명대로 살아서 업적없이 죽는것인가? 사명이란게 그냥 평범하게 사는것인가? '사명'이란것이 너무 성과주의적인 사고가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물론 선량하게 사는것이 사명일 수도 있다. 근데 교회에서는 유명한 사람들의 사례를 너무 말한다. 1%의 사람들의 이야기만 너무 말하는것이다. 그리고 와 대단하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명이 빛나고 있다. 그런다. 이름없이 죽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럼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사명이라함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궁금하다. 목사님들은 목사가 사명이라고들 한다. 근데 과연 그럴까. 정말 과연 그럴까. 그냥 자기가 좋아서 목사한게 아닌가. 진짜 하나님이 명하시는 소리를 들은것인가. 사실 목사가 아니라 의사가 됬어야하는데 목사를 하고있는것 아닐까. 아니, 애초에 어떤 직업이 사명이 될 수 있는것일까. 그런건 그냥 사명이 아니라, 우연히 갖게 된 직업이 아닐까. 그래서 사명대로 안살아서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 고통스럽게 살고있는건데, 스스로는 올바른 사명의 길을 걷고 있으며 고통은 사명을 이루면서 겪는 시련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닐까. 그들의 확신은 그냥 자기만족이 아닐까. 옆에서 보는 나는 생각하고는 한다. 왜냐하면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먼지처럼 사라지는 99%의 사람들이. 너무나 평범한 사명을 갖고 태어나, 죽는다. 평범한것에 만족하고 평범한것만 생각하고 평범함 속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평범한게 행복한것이라고. 평범함 속에 있는 모든 순간순간이 빛나고 있다고. 자신의 소박함을 행복해하며. 그러나 성경에서 평범한 사람 이야기는 거의 없다. 성경 속 인물들의 삶은 평범하지 않다. 사명들이 평범하지 않다.
더 쓰고 싶은데 밤이 너무 늦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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