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앙 공부

교의의 진리 판넨베르크 조직 신학

by one_soul 2024. 3. 25.
반응형

판넨베르크 조직 신학 1

36p 2. 교의의 진리

 

교의학은 일반적으로 교의(Dogma)혹은 그리스도교 교리(가르침)에 관한 "학문"으로 통용된다.

 

교의라는 단어는 "판결"이나 "구속력 있는 의견"으로 이해되면서 그리스도교적인 가르침에 더해서 전승되었다. 

여러 철학적 학파들의 "교의들"과 같이 어떤 "학문적 견해"라는 특별한 의미로 이해되었다. 

 

교의의 그리스도교적 개념이 철학적 학파들의 학설과 유비 관계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철학적 이론들과 정면으로 대립 - > 왜냐하면 그 교의 개념은 "인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말하고 가르치는 것"(Athenagoras leg.2,1)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인간적인 가르침의 견해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리게네스(Origenes)는 그리스도교 교리들을 "하나님의 교의들"(dogmata theou)이라고 지칭했다.

 

 

 

이는 하나님긔 계시에 관계된다. 하지만 교의들은 인간, 교회, 그리고 교회의 사역자들이 작성하고 공표한다. 

그래서 다음 질문이 제기 된다.

-> 그 교의들은 어떻게 해서 인간의 의견이 아니고 인간이 고안한 것이나 전통에 불과한 것도 아니며 , 오히려 신적 계시의 표현인가?

 

우선 그리스도교 교의는 교회밖 사람에게 고대의 철학적 학파들의 구성원들에게 요구되었던 학문적 교의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게도 구속력을 갖는 교회의 가르침들로 보였다. 그리스도인들 자신도 이를 수용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교리를 하나님 자신의 진리와 동일시 하지 않게 되었다. 

 

진리 주장은 포기 된 것이 아니라 다만 보류되었다. -> 교회가 그 주장의 보증인인 것이 아니라 실행자에 그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교의들을 교회법적으로(그리고 국가법적으로) 구속력을 갖도록 결정하다 -> 교회 당국의 교리 공표와 관련한 수용 ㅇ과정은 종결되고 정지되었다. 

 

법률적인 확정과 국가 권력의 수단을 통해 교회적 교리의 진리에 동의하도록 강제하는 그런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종말론적인 진리를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공식 문구로 표현할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독단론은 교의 개념에 대해 나쁜 평판을 불러일으켰다. 

 

신앙의 강요는 논쟁이 되는 교의의 진리성을 결정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그것도 물리쳐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모겆ㄱ에도 부합하지 않는 적절치 못한 수단에 불과하다

 

 

합의는 진리에 대한 표식(Kennzeichen)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는 판단의 일치 속에서 진리의 보편성이 표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레랭의 뱅상의 명제. 434년,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보편적 가르침 즉 교회 전체의 교의가 무엇인지 확정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나, 언제나, 모든 사람이 믿었던 것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교들의 모임, 교황 한 사람이 기능상 전체 교회의 대표자로서 말할 때 그것은 전체 교회의 신앙적 합의를 교회적 기관의 권위를 통해 표현하는 듯이 보인다.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서도 믿음의 교의들이라는 표현은 구속력 있게 제시된 교회의 교리들, 즉 하나님이 계시하셨다고 미덩야 하는 교의들을 가리켰다.  이 맥락속에는 교회의 교직이 작성하도록 되어 있는 가르침의 진술들이 믿는 자들 전체를 통해 수용되는 과정이 언급되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그런 합의가 그 수용에 의존한다는 것이 명시적으로 배제되지는 않았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공의회의 유명한 명제는 제한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황이 자신의 직무에 의거해서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행하는 가르침의 진술들이 교회의 동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부터 적법하고 변경불가하다는 명제였고 이것의 제한적 해석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 진술들이 다른 어떤 법정을 통한 형식적인 확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 그 진술들을 실제로 수용하는 과정이 교회적 삶과 신앙 의식 속에 위치하게 될 그것들의 자리의 가치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열려 있게 된다. 

 

 

어떻든 실제로 존재하는 교회의 합의도 역시 (어떤 주어진 시간에 혹은 시가대를 잇는 연속성 안에서) 그것만으로는 믿음의 진리에 대한 충분한 기준이 될 수 없다. 

 

 

합의 : 합의란 어떤 그룹, 어떤 사회, 어떤 문화의 구성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단순한 합의의 표현에 그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다, 17세기 초, 종교의 일치가 사회의 일치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생각되었지만 이후의 시대에는 단순히 관습적인 신념임이 드러났다.

 

합의의 관점은 교회의 교리에 대한 종교개혁의 이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제 7조에 따르면 "복음을 가르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에 대한 합의"가 교회 일치를 위한 필수적인 총괄개념이다. 

 

루토교회의 신앙고백은 철두철미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행에 관한 전체 교회의 합의를 목표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신앙고백은 성서에 근거했을 뿐 만 아니라, 또한 고대 교회의 교리와 특히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와의 일치를 추구했다. 어떻든 교회적 교리의 진리성의 기준은 합의 그 자체가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과의 일치였다. 

 

교회적 교리의 합의는 우선적으로 "복음의 가르침에 관한 합의"라는 점에서 중요해진다. 

신약 성서의 증언과 일치한다는 것은 어떻든 그 성서 속에서 표현된 원시 교회의 교리 및 선포와 일치한다는 뜻이다.  뱅상의 합의 개념도 우선적으로는 사도들의 선포 속에 나타난 교회적 교리 전통의 기원과 일치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 선포는 신약성서 안에 침전 되어 표현되어있다. 

 

"복음의 가르침에 관한 합의"라는 루터의 구상은 이 위치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다른 어떤 전망을 갖는다. 그것은 복음과 성서 안에서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규범적 기능이다. 성서와 교회의 비교, 더 정확하게는 성서 안에서 증언된 복음을 교회의 교리 및 신앙고백과 비교하는 것이 종교개혁 신학의 특징이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믿음의 새로운 조항을 만드는 것이 아니며, 성서 안에 증언된 복음에 대한 믿음의 고백일 뿐이다. 

-> 그러므로 교회의 교리에 대한 종교개혁적 이해는 순수한 합의론적 특성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과 교회의 비교 명제는 다음 사실을 전제한다. 첫째, 복음은 신약성서 안에 있는 원시 교회의 증언들보다 앞서 주어진 것으로서 그 증언들로부터 구분된다. 둘째, 복음은 일치된 것으로서 신약성서 저자들의 다양한 신학적 관점들과 대면하며, 신약성서에서 그 일치성이 인식될 수 있다. 

 

이 두가지 전제는 모두 가톨릭 교회가 제기하는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다. 

 

오늘의 가톨릭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서의 신학적 일치"라는 전제에 집중하는데, 이 통일성은 종교개혁이 전제했던 것처럼 성서 자체로부터 직접적으로 제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성서의 통일성은 "최종적으로 해석자의 이해와 그의 영 안에서 실현 "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 중심적인 내용의 통일성은 오직 해석이란 매개를 통해서만 탐구되고 발견될 수 있따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성서의 "실제 내용"(Sache)은 해석 그리고 그  해석과 관련된 해석학적 관점들의 상대성 없이는 접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반적인 해석학적 원칙에 근거하여 이렇게 주장하게 된다. 각각의 해석은 해석되어야 할 본문의 실제 내용이 해석자의 노력들보다 앞서 주어져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비록 그 실제 내용의 특성이 오직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만 등장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와 같은 전제 조건이 없다면 본문과 해석자의 결합은 문학적 창작의 자유와 더 이상 구별될 수 없게 될 것이다.  본문의 실제 내용이 해석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그 내용은 본문의 말씀 속에서 저자가 의도했던 것으로 표현된다. 

 

 

어떠한 해석자도 실제 내용의 진리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오히려 진리가 자신에 대한 토론의 과정 속에서 해석자의 해석에 대해 결정할 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