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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version 묵상

여러분에게는 기도가 있습니다! 6일째

by one_soul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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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균형 잡힌 기도의 여섯가지 열쇠 – 제 2 부”

4. 여러분의 개인적 필요를 표현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구하십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심오하고 무한하며 무조건적이며 종종 성경에서 사랑하는 아버지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는 것과 비교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로부터 (여러분으로부터)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필요와 소망을 듣고 싶어하시며,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킬기 위해 하나님께 여러분이 오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이 바라는 그 이상의 것을 축복하도록 만듭니다.

5. 하나님께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시고, 여러분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할 필요가 있음을 염두에 두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먼저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여러분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용서로 인해, 죄책감, 수치심 그리고 정죄로부터 자유로울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를 받는것이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도 같습니다 - 괴로움과 원한 그리고 해묵은 상처로부터 지속적으로 우리를 상처받게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게됩니다.

받아들이는 것과 주는 것 모든 의미에서의 용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데 기본이 됩니다.

6. 하나님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유혹과 상황을 피할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요한일서 1:9에서 약속하신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유혹을 겪을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이 부분은 미래에 죄를 피하는 중요성을 염두에 두지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에 단순히 도취되어 만족하지 않도록 하는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함으로써 죄의 영적 형벌을 제거하시지만, 죄의 해로운 결과를 제거하시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혹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 기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하나님께 할애하는것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매일 여러분을 만나는것에 제한을 두시지 않습니다. 또한, 긴장하도록 하고, “깜빡 조는 것”을 피하는 것이 때때로 어려울수 있습니다. 낙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께 시간을 할애하여 기도하면 축복을 받을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십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장 11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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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실까. 하나님은 모르는게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아도 다 아신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의 기도와 찬양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단지 기뻐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알고 계신 시간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은 사람의 삶에 주어진 짧은 시간 중 기도하는 그  짧은 순간을 기뻐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관점은 그렇다. 그러나 반면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고통스러운 가운데, 한치 미래 앞도 보지 못하는 와중 좌절스러운 과거만 있는 가운데 눈물로 기도하며 소원을 빈다. 그러나 그 소원이,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기도에 침묵하시며 돕지 않으신다. 실제로는 하나님은 기도를 기쁘게 듣고 계시지만 사람으로서는 기도해도 이뤄지지 않는 절망 속에 있는것 같다. 과연 평생을 가난속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하나님은 기도하면 기쁘게 들어주신다 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까. 나는 위로가 될 수 는 있을 수 있겠으나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믿음에 달려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가난은 없어지지 않는다. 병도 사라지지 않고 고통도 슬픔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적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 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면 기쁜일이 일어난다고 얘기하는건 거짓말이라 생각된다. 오히려 슬픔이 더욱 더 찾아온다. 하나님을 믿으면 시련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있는 자들만이 시련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믿음 있는 자들도 시련 속에서 기쁨을 찾는건 어렵다. 그렇다면 정말 소수중의 소수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기쁨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종종 하나님께 찬양드리는게 너무 기쁘고 하나님을 믿는게 너무 기쁘다 이러는 사람들도 보이긴 하지만 그러는 분들의 대부분에게 '왜' 하나님을 믿는게 좋냐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왜 좋은가 묻는다면 무슨 대답을 하는가. 세상에서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설득될만한 좋은 이유를 댈 수 있는가. 사람들에게 위로할만한 , 그런 이유를 댈 수 있는가. 사실 물어볼때 그 사람이 행복한 환경에 있는가 아니면 처절한 고통 속에 있느냐를 구분지어야 하기도 하다. 사실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이 좋다 얘기하는건 쉬운일이다. 행복속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당연히 그렇겠지 생각된다. 그러므로 행복한 사람의 대답은 논외다. 그러나 어려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좋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마음이 생긴다. 그런 사람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팀 켈러의 고통에 답하다를 보며 든 생각이다. 그 믿음에 대해서는 그저 믿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행동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볼때엔 맹신적인 충성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거라 생각된다. 하나님은 응답은 커녕 저주를 퍼부은 것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하고 믿는 충성심. 이는 맹신에 가깝다. 실재 현실에서는 독실한 사람이나 가볍게 믿는 사람에게나 하나님을 나타내는 증거는 똑같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증표도 나타내지 않으신다.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를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분이라면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증거만 있다면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람은 맹신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맹신은 말그대로 맹신이다. 나는 하나님을 확신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한다. 사람은 단지 믿음대로 행할 뿐이다. 믿음은 확신에서 오는게 아닌 불확실 속에서 행함으로 생기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맹신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신앙적인 맹신은 개인적인 맹신이 아니라, 집단적인 맹신이다. 그리고 그 맹신은 경험,논리, 역사, 철학 등을 넘어 초월의 영역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게 세속의 맹신과 신앙인의 신에 대한 맹신의 다른 점이다.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은 기도를 기쁘게 들으신다고 한다. 사람은 과연 하나님이 정말 그럴지 알 수 없다.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열심히 소원을 말했는데, 간절히 문제가 해결되길 빌었는데 과연 그것을 하나님은 기쁘게 들아주셨을까. 일단 하나님은 소원은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럼 소원 성취 여부는 뒤로 하고 기도했던 그 믿음만으로 사람은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가. 희망이 생길 수 있는가. 평온이 생길 수 있는가. 용기가 생길 수 있는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을 진정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돕지 않을것이란 걸 안다. 하나님은 무엇도 해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 하나님은 마음에 위로조차 주시지 않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의 기도는 변화를 바라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된다. 여러가지 자잘한 소망은 사라진다. 그 대신 이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하고. 기도는 믿음을 행하는 일중의 하나로서 믿음의 지표란 의미로 하게 된다. 기도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 기도는 나를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만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된다. 더이상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뤄주신다, 위로해 주신다를 믿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게 된다. 단지 기도는 믿음의 징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도를 기뻐하시는 이유는 믿음의 징표이기 때문인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현재의 내가 생각하는 기도의 의미다. 아직 나는 기도로 뭔가 이뤄본적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기도의 의미는 아직 모른다. 구하라 그럼 주실 것이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기도로서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성경에서도 목사님들도 또 이런 youversion같은 데서도 권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기도는, 내 생각엔 이뤄지지 않는다. 혹은 어쩌면, 하나님께 이루어질 기도와 이루어지지 않을 기도를 구분하고 포기하는 지혜를 달라고 나는 기도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불가능한 것을 기도해왔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 욕심만을 앞세웠는지도 모른다. 혹은 죄가 너무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기도 방법이 잘못됬거나. 그러나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라도 응답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눈물로 기도 해도 응답은 없다. 그게 너무 오래되니까 이젠 기도의 힘이, 성경의 말씀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부디 잘 이끌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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