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32 (KRV)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3 (KRV)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마태복음 6:14 (KRV)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태복음 6:15 (KRV)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18:21 (KRV)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마태복음 18:22 (KRV)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마가복음 11:25 (KRV)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고린도후서 2:10 (KRV)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누가복음 6:37 (KRV)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누가복음 17:3 (KRV)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잠언 19:11 (KRV)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마태복음 18:35 (KRV)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고린도후서 2:7 (KRV)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누가복음 17:4 (KRV)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용서하는것
용서를 하는게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용서의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누군가의 악행 혹은 악의가 나에게 쏟아졌을때, 부당한일, 억울한 일, 수치를 당하는 일 등등 사람들은 여러가지 일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정말 끊어내고 분노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도무지 용서가 안될때가 있습니다. 이는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고통스러울정도로 용서가 되지 않는 경험을요. 용서하라는 신의 말씀이 원망스러워지는 경험을요.
설교 시간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목사님 부부에게는 외아들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매우 착한 성품을 가졌고 남을 돕기를 잘 했다고 합니다. 그 아들도 아버지를따라 목사가 될 것이었다나요. 목사님 부부에게는 매우 귀한 아들이었다고 하죠. 그런데 어느날 그는 부당하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냥 살인범에게 말이죠. 보통 사람이라면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은 가장 슬픈 일이라고도 하죠. 그런데 이 목사 부부는 보통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해냅니다. 그것은 살인범을 용서하는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부부는 살인범을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주기까지 했습니다. 원래는 교도소에서 종신형 혹은 사형을 당할 처지의 살인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친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양자로 삼은것입니다. 친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양자로 받아들인다는것. 그래서 사랑을 주고 키워주고 지원해준다는것. 그것은 보통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람을 용서하라'라는 말을 들으면, 사실 그게 옳다는것은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외아들을 희생하셨고,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우리 인류를 구원해주셨다는것도 압니다. 그것은 정말 큰 은혜로서, 우리 또한 그를 본받아 우리끼리의 허물을 서로 용서해주고, 위로해야한다는것도 알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말이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용서하기를 잘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용서해주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사람을 용서해야한다는것을 배웠지만, 실생활에서 용서를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용서를 해주면 내가 호구인것 같고, 지는것 같고, 혹은 용서를 해주면 만만해보이게 될까봐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분은 용서를 해주어봤자 내가 손해더라 라는 경험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용서를 너무 쉽게 해줬더니 , 오히려 우습게 아는 악한사람도 존재하니까요. 그리고 또한 우리가 이렇게 용서를 계속 한다면, 그럼 정의는 어떻게 세우며, 용서를 이용해서 계속 악행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응해야하나? 라는 생각도 듭니다.
나도 죄인 중 하나라는것을 압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다 죄인으로 타고 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에 우리는 감사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처럼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를 하는게 맞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확실히' 나보다 더 악해"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악하므로 '판단'받고 '처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분노가 마땅하고, 죄인은 그 분노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그자는 벌을 달게 받고 혼이나서 우리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스스로도 죄책감으로 인해 수치스러워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사람은 누군가 잘못하면 평생을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 살아야한다고도 하죠. 평생 되는일이 없고 저주받아야 마땅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이죠. 그 누구도 그를 가엾어 해서도 안됩니다. 그 사람은 나남은 날을 잔혹한 벌을 받으면서 고통스러워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마땅'합니다. 신의 진노가 내려 짓밟힌 인생을 살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 깊은데서 솟아오르는 마음입니다. 여기에 교회에서 배운 '용서' 해야한다는 말씀은 허물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죄인이 자신의 죄를 돌려받아 고통을 받으면, 우리가 그들에게 행할 사랑은 어디에 남아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주는건가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걸까요?
솔직히 나는 죄를 안지으려고 하는데, 상대는 뻔뻔스럽게 죄를 행하고 또 상처를 주고 사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은 판단하고 그를 정죄하고자 하는 마음이 솟아오르는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다른 이웃의 죄를 될수있는한 용서하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음행을 저지른 여자에게 사람들이 돌을 던지려할때 예수님께서는 바닥에 글씨를 쓰면서 '너희 중 죄없는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라고 하셨죠. 그리고 결국 사람들이 모두 한명도 돌을 안던지고 떠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어쩌면 죄를 짓는자가 자신이 짓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을 내리실것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그는 죄를 짓지 않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란것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이에게 상처를 주는 죄를 아무생각없이 저지른 건지도 모릅니다. 다른 종교에도 있죠. '카르마'라는 개념이 있는데 사람이 하는 행실에 따라서 카르마는 생성됩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카르마를 짊어지게 되어 그에 대한 벌을 반드시 받는데 이는 죽은 후에도 계속 이어져 윤회하는 삶속에서 그것을 갚아나가게 됩니다. 불교에서도 타인에게 짓는 죄는 '인연'이 되어서 그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악한 행실을 저지르면 그것은 반드시 생성요소가 되어 훗날 그에 대한 과업을 받게 된다. 악한 행실을 하면 그에 마땅한 죄값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악행따위는 순간 저지르고나도 자신에게 전혀 해가 될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끝낼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초자연적인 선악에 대한 '제재'가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죠.
그러나 우리가 볼때,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자가 얼마나 불행한 자인가요? 그들은 모르는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모를뿐더러 자신이 죄값을 받을것이라는것 조차 모릅니다.
우리는 반면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징벌이 있다는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것을 안다면 어쩌면 우리는 오히려 죄지은자를 위해 기도해야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지해서 야만적이고 힘겹게 살아야만 했던 과거시대의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실 우리는 타인을 판단해서는 안되는것입니다. 그것은 오만 중 하나라고 알고있습니다. 타인을 판단하는것은 타인이 지은 죄로 인해 내가 또 죄를 연달아 짓게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나를 공격하거나 상처를 주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나약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가엾게 여겨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형제를 판단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마음을 희생하고 높은 수준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으로만 말씀하신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입견으로 인해서 분노에 휩싸여 용서를 어렵게 여기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뻔뻔스레 죄를 짓는 사람이 공의의 하나님의 섭리를 모른다는 것과, 또한 우리가 우리가 좋아하는 자에게만 사랑을 주는게 아니라 죄인에게도 사랑을 전한다면 더 복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저절로 솟아오르는 분노하는 마음을 희생하는 고통, 힘에겹게 억지로 하는 용서가 아닌, 자연스럽게 마음속 깊은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가 누구나 가능합니다. 용서가 어려운 것이고 그것이 높은 사랑의 실현임은 맞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꺾으라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억지로 용서하는 마음을 내라고 하시는것이 아닙니다. 죄지은자를 가엾게 여기고 기도해주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열린 마음은 내가 받은 상처는 곧 치유될것이라는 자신감있는 믿음과,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택되었으므로 축복받았다는 것 들을 떠올리면 좀 더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용서를 하더라도 진정한 용서가 되어야 비로소 그것이 내 마음을 진정으로 치유해 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용서가 곧 치유라고도 많이들 말합니다. 실로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용서는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미움이 바뀌어 진정으로 자연이 그 죄인이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을때 진정한 용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냥 죄지은 자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으로 끝내는 것은 조금 어중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어중간하게 넘어가는 것보다 깨끗하게 치유되는게 더 나을것입니다. 어려우신 분들은 어쩔 수 없이 어중간함을 택해야하겠지만
용서에 대해서 우리는 인간적인 나약함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서는 정말 어떤 경우에는 고통스러울정도로 힘든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우리에게 용서를 하라고 하시는것이 아닐겁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상처준 사람을 미워함에서 그를 가엾게 여기고 기도를 해주는 마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며 우리의 든든한 뒷배가 되며, 또한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풍족한' 사랑으로 내 마음이 가득차면, 그 사랑이 흘러넘쳐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이는 초인간적인 '성인'의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능한 과학적인 사랑입니다. 성경은 훌륭한 사람을 위해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읽고 복을 받도록 쓰여졌습니다. 성경은 배운자든 못배운자든, 부자든 가난하든 성경대로 실천하면 가능한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용서도 성자혹은 훌륭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여 고통받는 분들께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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