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1
Exodus 21
출애굽기 22
Exodus 22
출애굽기 23
Exodus 23
교회에서 목사님이 하루에 3장을 읽고 주말에는 5장을 읽으면 1년이면 성경을 모두 읽을 수 있다고 하셔서, 그렇게 해보려고 한다. 사실, 하루에 3장 읽는것은 약간 무리일수도 있을것 같다. 너무 길게 읽으면, 내가 생각하는 시간이 줄어들기때문에.... 그래서 봐가면서 해야겠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경우에는 그다지 생각할게 없는 구절이라서...
융통성 있게 해야지!
여하튼 오늘 보니까... 일단 나는 하나님께서 노예제도를 그냥 두시기는 했지만(심지어 노예를 자산 이라고 표현했다) 뭔가 다른 나라들보다는 노예들에게 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6년 일하고 나면 그 다음해에는 아무런 댓가 없이 풀어주라고 한 것 말이다. 그러나 그 남자 노예에게 다른 여자를 주인이 줬다면 그 여자를 두고 노예 남자는 떠나가야 했다. 그의 자식들도 두고서. 그것은 약간 조금 슬픈일인것 같다. 여자는 정말로 재물 취급인것일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 다 뜻이 있을것이다
어쩌면, 맨몸으로 자유가 된 남자 노예가 자신의 부인과 자녀를 다 함께 데리고 나가는 경우, 그 남자 노예에게는 자기 혼자만이라도 밥먹어 벌어오기 힘들어서 주인 가족이 일부러 그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 노예가 아무것도 없이 나가니까, 그 가족을 벌어먹일 능력이 없기에 말이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떠도는 처지였으니까, 일자리도 어쩌면 부족했을것 같다. 그렇다면 노예 남자는 다른 주인에게로 찾아갈 수 밖에 없는데, 그럴때 자신의 부인과 자녀를 모두 데려가기가 조금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주인 가족에게 자신의 부인과 자녀를 맡겨두고 단신으로 홀로 나가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한편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도 .. 함무라비 법전이었던가.
맞습니다, 출애굽기 21:26-27의 구절은 함무라비 법전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주인이 노예에게 신체적 손해를 입혔을 때 그 대가로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이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인류의 존엄성과 신체의 무결성을 어느 정도 보호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함무라비 법전과의 유사성
함무라비 법전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전으로, 기원전 18세기경에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탈리오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범죄에 대한 보복의 원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노예와 관련된 규정이 있으며, 특정한 상황에서 노예에게 신체적 피해를 입혔을 때 일정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함무라비 법전 제199조는 “만약 사람이 타인의 눈을 부수면, 그의 눈도 부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노예의 신체를 손상시킬 경우에도 주인이 보상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차이점
하지만 출애굽기의 규정은 함무라비 법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이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대칭적인 보복을 강조하는 반면, 출애굽기는 주인이 노예에게 손해를 입혔을 때 그 노예를 해방시키라는 규정을 두고 있어, 단순한 보복보다는 노예의 해방을 강조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유사성과 차이점은 당시 고대 근동 지역의 법과 관습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시사하며, 동시에 성경의 규정이 고유한 윤리적, 신학적 의미를 가지도록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과거에는 이렇게 눈에는 눈... 과 같은 법이 있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원수가 네 뺨을 치거든 다른쪽 뺨도 대어라. 라고 하신다. 원수를 사랑하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구약시대와 현대가 다른식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맞다고 생각한다
구약시대에서는 아직 사람들이 지금처럼 잘 살지도 못했고, 뭐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으며 교육 수준도 낮았고, 문맹도 많았을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사람들, 즉 대중들은 자신이 먹고 살기에만 바빠서, 이타심이나 인류애같은 소양이 길러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단은 무엇이 옳은 선인지를 대중들에게 가르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는 어느정도 소양을 갖추었기에 이렇게 소양을 갖춘 뒤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다시 새로이 내려주셨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원수에게 보복하는것이 아니라, 원수의 잘못도 용서하는 대인배가 되어라는 말씀을 내려주셨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그렇게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현대인들은 자기 만족에 중독되어있기 때문에, 분노도 자기 만족할만큼 다 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것 같다. 나도 그렇고 말이다. 나는 분노를 제대로 다룰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께 많이 기도해야한다고 생각된다. 정말이지... 부끄럽지만 분노 조절이 안된다. 그리고 나는 분노 조절이 안되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매우 침울해진다. 이걸 좀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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