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6
Leviticus 6
레위기 6장에서 아론의 자손들이 제물들을 먹게되잖아. 아론의 자손들은 부자가 됬겠네
**레위기 6장**에서 언급된 아론의 자손들이 제물을 먹는 부분은,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그들의 제사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받는 일부 혜택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고,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일부 제물을 받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는 것은 부를 축적하는 행위라기보다는, 그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은 매우 중요한 종교적 책임이었고, 이를 통해 제사장들은 직접적인 경제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에서 일부를 나누어 받도록** 하셔서 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죠.
### 제사장의 혜택과 의미:
1. **속죄제, 화목제 등에서 일부 음식**이 제사장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음식들은 거룩하게 취급되었고, 정해진 규정에 따라 먹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속죄제물**의 일부는 제사장이 먹었으나, 완전히 태우거나 특정 장소에서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2.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의 생계**는 백성들의 제사와 헌물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이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사역**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자가 되었다기보다는 그들의 **직분 수행에 따른 기본적인 생계 유지**가 목적이었습니다.
### 부의 축적 여부:
제사장들이 제물을 통해 얻은 혜택이 있긴 했지만, 이들이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은 주로 왕족이나 군사 지도자들이었지, 제사장들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며 백성들을 섬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즉, 아론의 자손들이 제물을 먹는 것은 그들의 역할에 따른 생계를 위한 것이었고, 이를 통해 부자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사장 직분은 영적 지도자로서의 무거운 책임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죄를 속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루에 제사를 여러번 드릴텐데, 그때마다 제물을 먹을 수는 없잖아
맞아요, 하루에 여러 번 제사를 드리면서 매번 제물을 먹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레위기 6장**의 규정에서도 제사장들이 제물을 받을 때 이를 적절하게 취급하고, 거룩한 방식으로만 먹도록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제사 때마다 제물을 먹을 수 없는 이유와 제사장의 음식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측면을 포함합니다:
### 1. **제물의 종류에 따른 규제**
제사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으며, 각 제사의 목적과 규정이 다르기 때문에 제사장이 모든 제물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 **번제**: 제물을 완전히 불태우기 때문에 제사장이 먹을 수 없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제사로, 남는 부분이 없습니다.
- **속죄제와 속건제**: 죄의 용서를 구하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서는 일부 제물(고기)을 제사장이 먹을 수 있지만, 이는 **정해진 장소**에서만 먹도록 규정되어 있고, 남은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거나 완전히 태우도록 규정된 부분도 있습니다.
- **화목제**: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원하는 제사로, 제사장뿐 아니라 제사를 드린 사람도 일부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거룩한 장소**에서만 먹을 수 있으며, 먹지 않고 남은 고기는 정해진 시간 내에 처리해야 했습니다.
### 2.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제한**
제사장이 아무 때나 제물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거룩한 장소**에서만 먹을 수 있었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레위기 7장 19절**을 보면 제사장은 제물을 반드시 깨끗한 상태에서 먹어야 하며, 더러워진 고기는 먹을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 3. **목적은 부가 아닌 생계**
제물을 먹는 것은 제사장의 직무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졌지만, 이는 **부를 축적하는 목적**이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그 과정에서 일부 음식이 그들에게 주어졌지만, 모든 제물을 다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사역을 위해 주어진 최소한의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 4. **제사 횟수와 음식의 조절**
하루에 여러 번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매번 제물을 먹을 수는 없었고,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제물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제물의 남은 부분은 불태우거나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과도하게 음식을 축적하거나 먹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은 **균형 있는 방식으로** 제물의 일부만을 섭취했으며, 이는 그들의 건강과 신체 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음식만 제공되었습니다.
### 결론
제사장들이 매번 제물을 먹는 것은 아니며, 엄격한 규정 하에 일부 제사에서만 제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수준이었지, 부를 축적하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현대에도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기도 하나? 유대인들 중에 아론의 자손이라 분류된 자들이 있는가?
현대에도 **아론의 자손**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코헨(Cohen)'**이라는 특별한 계급으로 불리며, 전통적으로 유대교에서 제사장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 아론의 자손과 코헨(Cohen)
1. **아론의 자손(Cohenim)**: 유대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아론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들은 **코헨(Cohen)**이라고 불립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제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아론의 후손은 대대로 제사장 직분을 계승했습니다.
2. **코헨의 역할**: 과거에는 코헨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집전하며 다양한 제사 의식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파괴**되면서 제사 의식이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성전이 없어졌기 때문에 **현대 유대교에서는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 현대의 코헨(Cohen)
1. **특별한 지위**: 현대 유대인 사회에서 코헨은 여전히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기도 모임에서 **코헨은 첫 번째로 토라를 낭독하는 사람**으로 선택되거나, **특정 축복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과거와는 달리 제사 의식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예배와 공동체 생활에서의 상징적 의미에 가깝습니다.
2. **유전자 연구**: 현대에 들어서, 일부 과학자들은 코헨 계열에 속하는 사람들의 유전자 패턴을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많은 코헨들이 **'코헨 모달 해플로타입'**이라는 특정한 유전자 마커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아론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이들이 실제로 혈통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제사 의식의 중단
**제사가 중단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교의 중심이 제사 의식에서 **기도와 율법 준수**로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더 이상 동물 희생 제사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속죄하지 않으며, 대신 **회개, 기도, 자선**이 죄를 속죄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전통을 따르는 일부 사람들은 미래에 **제3성전**이 건축되면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이를 준비하는 움직임도 존재합니다.
아니 성전이 파괴되었으면, 돌제단을 새로 쌓아서라도 제사를 올려야하는거 아니야?
유대교에서 성전이 파괴된 후에도 새로운 돌제단을 쌓아 제사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유대교 전통과 율법에 따르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파괴된 후에는 다른 장소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결정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 1. **성전의 독점성**
구약 성경과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제사 장소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신명기 12:13-14에서는 하나님이 제사를 드릴 장소를 정하셨으며, 그곳이 성전이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외의 다른 곳에서는 공식적으로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 "너는 마음대로 아무 성읍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서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거기서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행할지니라." (신명기 12:13-14)
이 때문에, **돌제단을 새로 쌓아도 그것은 성전의 권위를 지니지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제사가 될 수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 2. **성전의 파괴와 제사의 중단**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파괴된 후, 성전 중심의 제사 제도는 더 이상 실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유대교 지도자들은 **기도, 율법 준수,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다가가는 방법을 새롭게 찾았습니다. 이를 통해 유대교는 제사 중심의 종교에서 **율법과 윤리적 삶을 강조하는 종교**로 전환되었습니다.
### 3. **미래 성전의 기대**
일부 유대교 전통에서는 **제3성전**이 지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때가 되면 다시 제사를 재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성전이 없기 때문에 다른 장소에서 제사를 재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성전 재건을 위한 운동도 있지만, 여러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 4. **대체 제사 방식**
성전 파괴 이후, 유대교는 제사 없이도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기도, 회개, 자선**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가능하다는 신학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욤키푸르(속죄일)** 같은 중요한 유대교 절기는 **기도와 금식**을 통해 죄를 속죄하는 날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전 없이도 새로운 돌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리기보다는, **성전 재건**을 기다리며, 그 사이에 **기도와 율법 준수**를 통해 신앙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유대교 전통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나 중요한 성전이 무너지게 내버려 두신걸까?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에게 중요한 사건으로, 신학적으로 다양한 해석을 낳았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이유에 대해 성경과 종교적 관점에서 몇 가지 해석이 제시됩니다.
### 1. **유대교 관점: 죄에 대한 심판**
유대교 전통에서는 성전이 파괴된 것을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우상 숭배를 하거나 사회적 불의를 저지르면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사건은 이러한 경고가 현실이 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바벨론에 의한 첫 번째 성전의 파괴**(기원전 586년)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빠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됩니다. 예레미야서와 같은 예언서에서는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면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며, 성전 파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관점이 강조됩니다.
예레미야서 7:12-14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 “너희가 일찍이 내가 내 이름을 둔 곳, 곧 실로에서 행한 것을 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준 이 성전, 너희가 신뢰하는 이곳,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곳에 대해서 내가 실로에 행한 것처럼 행하리라.”
이는 백성들이 성전 그 자체에 대한 신뢰를 가졌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 2. **기독교 관점: 새로운 언약**
기독교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새로운 언약**의 도래와 연관짓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중에 **성전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1-2에서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요한복음 2:19에서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이해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유일한 장소가 아니며, **예수님 자신이 성전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성전의 파괴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가 그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음을 상징하며, 모든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히브리서 9장에서는 예수님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는 대신,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더 완전한 구속을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성전에서의 희생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신학적 개념이 등장합니다.
### 3. **역사적 관점: 성전 중심 신앙의 변화**
성전 파괴는 유대교 신앙 구조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고, 성전 중심의 종교에서 **율법과 회당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도, 회개, 자선**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요한 수단으로 강조되었습니다.
이는 또한 유대교가 **더 내면적이고 윤리적인 신앙**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특정한 장소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어디서든 경배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었습니다.
### 4. **신학적 해석: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계획**
성전의 파괴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존중하시며, 그 선택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를 허락하신다는 신학적 해석도 있습니다. 즉, 인간이 불순종하거나 잘못된 길을 선택할 때, 하나님은 경고를 주시고 교정을 촉구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결정을 존중하십니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로 성전이 파괴된 것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더 큰 신앙적 각성을 촉구**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에 대해 경고하셨고, 그 경고가 실현된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기독교적으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새로운 언약과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파괴는 더 깊은 신앙적,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며, 성전이라는 물리적 구조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더 내면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성전파괴에 대한 내용을 챗지피티에서 읽었었는데, 제대로 생각을 하는것은 오늘이 처음인것 같다. 성전의 파괴라는것은 유대인으로서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뜻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과연 '누가' '해석'을 했을까?
현대에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예언을 하는 자가 없으므로 단지 무언가 일어난 사건을 보고 그것을 인간이 임의로 '해석'한다.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가 '해석'을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상 그만의 해석이며 동료나 대중들에게 지지받는정도에서 그치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그러하다고 장담할 수 없음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점점 빼앗아가고 있는 중인데, 게다가 전쟁까지 치르는건 덤이고,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사실 최근의 현대의 이스라엘 청년들은 신을 그다지 믿는편은 아니라고 하는것을 슬쩍 들은적이 있는것 같다. 그들은 유대교가 아니며 기독교도 아니라고 하는 것 같다.
한번은 동영상이 논란이 된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미사일을 쏘고 마을이 불바다가 되는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치의자를 두고서는 깔깔 거리면서 구경하는 동영상이었다.
이것은 여전히 이스라엘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증거인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의 성전을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석할것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모범을 보이는 나라가 아니다. 그들은 아직도 타락한 나라이다. 그런데 그들이 힘을 갖게 된것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악인들이 잘되는 꼴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자기뜻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신다고 하셨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녀들은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벌을 내리시고 그들을 올바른길로 돌이키려고 천사를 보내신다. 그래서 진정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잘못된 길을 걸으면 하나님께서 똑바로 걷도록 길을 이끄시는것이다. 그러나 , 악인들은 자기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리고 스스로 파멸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꼴이 딱 그 꼴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말이다.
이스라엘이 벌을 받기를 바란다. 이것은 사필귀정이다. 또한 벌을 받는것을 넘어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는것이다.
나는 미래에는 인권이 더 존중받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나의 이상주의이다. 그래서 전쟁은 사라질것이며, 굶어죽더라도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것. 그것이 기독교다. 이스라엘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말고 말이다.
'성경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0930 78일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제사장 위임식 (1) | 2024.09.30 |
---|---|
240927 77일째 Qt 제물을 드리는것 (6) | 2024.09.27 |
240924 75일째 QT 속죄제물 (5) | 2024.09.24 |
240922 74일째 QT 화목제사, 속죄제사 (3) | 2024.09.22 |
240920 73일째 QT 곡식 제물, 누룩의 의미, 소금의 의미 상징성 (1) | 2024.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