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5
Leviticus 5
레위기 5장은 주로 **속죄**와 **제물**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강조하는 교훈은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레위기 5장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전달합니다:
### 1. **작은 죄도 하나님 앞에 죄로 여겨진다**
레위기 5장에서는 고의적이지 않은 실수나 작은 잘못, 심지어는 실수로 죄를 지었을 때도 책임을 지고 속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크고 작은 것이 없으며, 의도적이지 않은 죄라도 깨닫는 즉시 회개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깊은 인식과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함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5장 1절에서 사람이 증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 혹은 깨끗하지 않은 것을 만지는 것 등의 죄가 언급됩니다. 이처럼 작은 일들에서도 하나님은 정결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 2.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며, 죄로 인한 결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관계를 깨뜨리기 때문에,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제사를 통해 죄의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속죄 제물로 사용되는 동물은 죄에 대한 대가로서, 죄가 죽음을 초래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 3.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용서받을 수 있다**
레위기 5장은 죄를 지은 후 깨달았을 때 즉시 그 죄를 고백하고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써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점은,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4. **하나님은 누구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레위기 5장에서는 제물의 종류가 다양하게 제시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비둘기나 고운 가루를 제물로 바칠 수 있게 했습니다(레위기 5:7-13).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그들의 상황에 맞게 제사를 드리고,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며, 누구나 죄의 용서와 회복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 5. **책임 있는 삶**
5장에서는 죄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후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면, 그 죄가 계속해서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깨닫고 죄에 대해 책임을 지며 하나님께 나아가면,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 6. **속죄의 필요성과 은혜**
마지막으로, 레위기 5장은 속죄의 필요성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없애고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제사 제도를 마련하셨고, 이를 통해 죄의 용서를 베푸십니다. 이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은혜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로도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레위기 5장은 인간이 지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책임을 다하여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용서를 얻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진실된 삶을 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개념으로서의 죄에 대한 두려움은 없을지라도, 다른 방식으로 도덕적 책임을 인식합니다. 예를 들어:
1. **사회적 도덕 기준**: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나 문화의 윤리적 규범을 따릅니다. 그 기준에 어긋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할 때에도 도덕적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낍니다. 사회적 기대와 규범은 죄책감을 유발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2. **개인적 윤리**: 종교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윤리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에 의존하지 않고도 강한 도덕적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잘못했다고 느낄 때 죄책감이나 후회를 느낍니다.
3. **심리적 영향**: 심리학적으로, 잘못된 행동은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비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해를 끼쳤다면, 심리적인 부담이나 죄책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감정입니다.
4. **카르마나 인과응보**: 기독교 이외의 많은 종교들도 행동의 결과에 대해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카르마(업)라는 개념을 통해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믿습니다. 이런 종교에서는 죄와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며, 자신이 행한 악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결국, 비기독교인들이 죄에 대해 전혀 두려움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들도 자신이 따르는 사회적, 개인적, 철학적 기준에 따라 잘못된 행동에 대한 내면의 갈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독교인들이 느끼는 죄책감과 구원의 필요성에 대한 신앙적 이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특히나 죄에 대해서 엄중했잖아.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것도 죄때문이고. 너무 가혹하지는 않아?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죄에 대해 엄중한 것은, 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는 기독교 교리에서 인간의 첫 번째 불순종(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상징하며, 그 결과로 인류가 죄와 고통 속에 살게 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죄는 단순한 잘못된 행동 그 이상의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결과적으로 세상에는 고통, 죽음, 그리고 인간의 불완전함이 들어왔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보면, 이 '타락'은 인간이 하나님이 정한 질서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선악을 판단하려 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 안에서 죄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다뤄집니다.
하지만 이 가혹함을 넘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도 함께 있습니다.
1. **죄에 대한 엄격함과 공의**: 하나님이 죄에 대해 엄중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정의)를 나타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완전한 거룩함과 정의의 하나님으로 여겨지며, 죄는 그 성품과 어긋나기 때문에 반드시 다뤄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즉, 죄는 단지 용서받고 넘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그에 따른 결과가 따른다고 보는 것이지요.
2.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는 하나님의 엄격한 정의만큼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강조합니다. 죄에 대한 가혹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직접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 해결책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다시 관계로 초대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한 사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신학적 사건입니다.
3. **에덴동산 이야기의 상징성**: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건은 단순히 벌을 의미하기보다는 인간이 자유 의지로 선택한 결과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가졌고, 그 선택의 결과로 인류는 죄와 죽음을 겪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버리지 않고 구원의 계획을 세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4. **구원의 메시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함은 구원과 은혜의 배경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만약 죄가 중요하지 않다면, 구원의 필요성도 덜해지겠지요.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구원 메시지에 크게 집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함은 그 자체로는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며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큰 틀 안에서 이해됩니다.
기독교의 '죄'라는 개념이 인류에 어떤 영향을 끼쳤지?
### 1. **도덕과 윤리적 기준의 형성**
기독교의 죄 개념은 서구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죄'는 단순히 사회적 규범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법과 뜻을 거스르는 행위로 이해됩니다. 이로 인해 개인의 행동뿐 아니라 **내면의 동기**까지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고, 이는 도덕적 책임과 자아 성찰의 문화로 이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같은 십계명은 기독교 사회의 기본적인 도덕적 규범을 설정하는 역할을 했으며, 서구의 법률과 도덕체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 2. **법률과 정의 체계**
기독교의 죄 개념은 많은 나라들의 법률 체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에서 기독교의 교리와 법률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죄'의 개념은 법률 체계에서 **범죄**와 **처벌**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죄와 정의, 회복에 대한 논의가 법률의 틀 안에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는 종교적 죄와 세속적 죄가 종종 구분되지 않았으며, 교회법과 세속법이 상호 작용하여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 3. **심리적 및 개인적 영향**
기독교에서 죄는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내면의 상태**도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마음속에서의 생각과 동기까지도 죄로 간주될 수 있음을 강조했으며, 이는 **양심**과 **내적 성찰**을 중요시하는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양심의 개념은 서구의 많은 철학적 논의와 심리학적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죄에 대한 죄책감과 회개, 용서의 개념은 인간의 내면 세계에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해 **심리적 성찰**과 **도덕적 성장**이 강조되었습니다. 죄의 고백과 용서는 죄책감을 경감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4. **구원의 개념과 인간 존엄성**
죄는 기독교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지만,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스스로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이는 인간이 비록 불완전하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라 하더라도,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구속**(redemption) 사상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구원과 은혜의 개념은 인류가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 5. **사회적, 문화적 영향**
죄와 구원의 개념은 많은 문화적 표현에 반영되었습니다. 예술, 문학,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주제가 다뤄졌으며, 특히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단테의 '신곡'**이나 **밀턴의 '실낙원'** 같은 작품은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죄와 구속의 이야기는 인간의 **도덕적 갈등**과 **삶의 목적**을 묘사하는 데 중요한 주제로 등장했습니다. 인간의 약함, 타락,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은 인류 문명의 문화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6.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
죄의 개념은 인간의 **불완전함**과 **연약함**을 강조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인간이 원래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에 있었으나, '타락'을 통해 그 관계가 깨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와 도덕적 약점**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사상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죄의 개념은 인간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겸손함**과 도덕적 성장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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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기독교의 죄 개념은 인류의 도덕적, 법적, 심리적, 문화적 영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죄는 인간의 불완전함과 도덕적 약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회개와 구원을 통해 새로운 시작과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수세기 동안 인류의 윤리와 도덕, 그리고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둥 중 하나였습니다.
모태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어렸을적에 구약을 읽고 하나님이 죄에 너무나도 엄중하다는 인상을 받고서... 그리고 나는 죄가 없는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으로 인해서... 나는 죄에 대해서 약간 민감한 편이 된것 같다. 그래서 무엇인가 잘못한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재빨리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늘 상 있었다. 그러나 점점 어른이 될 수록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닳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완벽주의도 있어서 죄에 대해서 더더욱 깨끗해지고 싶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나중에는 죄만 안지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기도는 등한시 하고는 했다. 죄를 안지었다면 기도도 할 필요도 없다.. 뭐 그런걸까? 사실 나는 그러나 기도 대신 혼자 생각으로 하나님에게 대화를 많이 걸기는 했다. 참 많은 대화였던것 같다. 그러나 한 10년전부터는 그 대상이 다른데로 옮겨갔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에게로. 그래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어지기는 했다. 근데 참 묘한것이, 내가 하나님에게 대화를 걸었던것이 성경 구절 중에, 재판관에게 하소연 하는 여자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것인데, 끊임없이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지? 하는 것을 나는 생각했던것이다. 그래서 '로또' 당첨되게 해달라고 계속 하나님께 구했다. 그 비슷한것과도 함께. 그런데 우울증이 오고, 정신과 의사 선생님에게 가니까, 자연히 하나님에게 하소연하던것, 구하던것이 정신과의사 샘에게로 향하게 되었달까? 그래서 내가 끊임없이 하나님께 하소연 하던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나로하여금 그만두게 하신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속으로 하나님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라는 마음이었는데 하나님이 이기신 것이다. 하나님은 늘 상 이기신다. 질 수 없으신 분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욕심이 언젠가는 이길거라고 착각을 한다.
사람의 운명은 모두 하나님의 소관인데, 사람들은 자기뜻대로 인생을 움직일 수 있을거라고도 착각을 한다.
그러나 인생은 절대 자기뜻대로 흘러가지 않을것이다. 몇몇 자기뜻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것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내 생각에는 절대 뜻대로 사는 인생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듯하다.
여하튼 말이 샜는데, 죄에 대해 민감해서 무엇이 죄인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했달까? 그런데 실생활에 적용되는 죄에 대해서만 너무 생각했던것 같다. 그래서 뭔가 소인배가 된것 같기도 한 느낌이다. 내가 하나님 대신 죄를 징벌하겠다고 내 주변 사람들의 죄를 눈감아주지 않은것도 있었고 말이다. 그것은 내가 죄 지은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벌하신것처럼 나도 내 주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하나님에게 심하게 징벌을 당한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10정도 죄를 지으면 5정도 벌을 받는다면 나는 1정도 죄를 지어도 10정도 징벌을 받는 느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다. 그냥 내 체감 상 문제인걸까. 아니면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뭔가 더 강하게 치시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어릴적에 '나는 깨끗한 사람이 되겠어' 하는 결심을 한적이 있다. 하나님 앞에 순수한 사람이 되어서 칭찬받아야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혼내주셔서 나로하여금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도 기도했었따. 그런데 커가면서 그런 부탁을 했던 내가 후회된달까? 순수하게 사는것은 어릴때나 가능하지. 어른이 되어서는 순수할 수가 없는데다가, 내가 저지른 죄가 너무나 누적되니까 무언가 언젠가부터는 죄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것도 있다. 이걸 어찌해야할지. 하나님에게 징벌을 내리시는것을 좀 그만둬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시지를 않으시는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앞에는 장사 없다고. 내가 점점 변한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나는 죄의 누적에 의해, 이미 돌이킬수 없다 생각하고 자포자기 한 감이 있었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고, 그리고 용서해달라고 하고. 그러나 또 다시 죄를 짓고. 그걸 반복하니까 나중에는 무뎌져서 정말 자포자기한것처럼 되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뭔가 좀 달라졌다. 마음에서 나쁜 마음을 내지 않으려고 나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것을 시도하기 시작하게 된게 있다. 과거의 나는 나를 변화시키는법을 몰랐다. 나는 나무처럼 한번 가지를 뻗으면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랬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심하게 치신것이 가지치기였는지 모르지만, 내가 다시 싹을 내면서 부드러워져서 올바른 방향으로 다시 가지를 뻗고 있따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조금 신기하기도 하다. 정말로 가지치기를 하신것일까?
내가 변화된다는 것. 낡은것에서 새것으로 된다는것. 그것을 겪게 하시면서 나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기분도 든다.
지난 시절 우울증때문에 내가 많이 괴로웠지만, 그 시간을 흘려보내고 내가 조금 변화되는것을 느끼면서 그것이 어쩌면 놀라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내가 마음먹은대로 나를 규정하고 싶었고, 내가 한번 정한 생각을 변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원래의 나를 버려야만 했다. 나를 깨부수고 새로이 만들지 않으면 안됬다.
솔직히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 나는 그다지 상상력도 없고 열정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끈 운명에 따라서 내가 이렇게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인생을 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게을러서 아무것도 하기 싫고 생각도 하기 싫은데 질질 끌려서 운명에 의해서 좀 마음이 성장한 그런 case라고 할 수 있을듯 하다.
그런데 열정을 어떻게 내야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번도 열정을 낸적이 없다. 늘 상 나는 너무 피곤하고 괴로웠으니까.
힘들고, 벅차고... 그러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신나게 즐기며 사는건지... 나는 허무하고 피곤하고 괴로우며 울적한데
여하튼 근데 방법은 하나 있다. 이런 내가 잘 살 수 있는 방법 하나. 그것은 미치는것이다. ... 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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