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할지 알려주는 설교는 엄청나게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메시지가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너는 사람들에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하라고 가르쳤는데, 너는 어떠한가? 너는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한가?" 정직한 증인은 예수님의 성향을 드러내는 그의 행동들을 통해 빛을 비추게 합니다. 그 사람은 진리를 설교할 뿐만이 아니라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기쁨으로 나타나는 방식은 칭찬의 욕망이 없는 평안속에 있습니다. 사람이 한 메시지를 하나님의 메세지로 알고 전하는 그 순간 창조 된 목적의 성취가 증거되고, 하나님의 평안이 자리를 잡으며,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탓함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묵상 질문: 내가 행하기 보다 설교하기 쉬워 하는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내 안의 그리스도의 빛을 가리는 그림자같은, 아직 해결 되지 않은 갈등이 당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있습니까? 어떤 교만이 평화를 이루는데 방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The Love of God, © Discovery House Publishers) 에서 인용했습니다.
내가 행하기 보다 설교하기 쉬워하는 진리가 무엇일까. 어떤 교만이 평화를 이루는데 방해하고 있을까?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는 질문이다. 그러나 여기는 인터넷 상이므로 아무도 나를 모르니까 써볼수도 있겠다.
내가 남에게는 말하지만 나 스스로는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용서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남을 용서하라고 한다. 싸우고 나면, 용서하는게 가장 쉬운길이다. 왜냐하면 싸우고 난뒤 그것을 곱씹거나, 그것에 상처입고 힘들어하거나, 복수를 자행하는것은 나만 손해라는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게 부질없으므로 그냥 용서하고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살면 좋다고 말한다. 친한 동생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냥 잊고 행복하게 사는게 가장 낫다고.
그러나 정작 나는 마음 한 구석에 내가 받은 상처들을 모조리 쌓아두었다. 그것은 언젠가 그에 맞게 그 사람에게 돌려주기 위해서이다. 나는 내가 받은 상처를 모조리 돌려주려고 다 쌓아두고, 가끔씩 잊지 않으려고 곱씹어본다. 나는 그때마다 뭔가 내가 복수의 화신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할수만 있다면 복수를 반드시 할 것이다. 나쁜 사람에게는 응당한 벌이 주어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의를 버리는 것이다. 악의 방치는 또다른 악의 구현과 같다. 악의 방치는 있어서는 안된다. 등의 이유들로 나는 무장되어있는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회가 오기전까지는 복수를 하지 않는 타입이다. 그래서 오히려 용서를 하고마는 타입인것 같기도 하다. 기회가 오지 않으면 따로 기회를 만들어내거나 까지는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가끔은 하지만)
나는 완벽한 승리와 완벽한 복수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다보니, 쌓인 원한이 많다. (완벽함이란 힘든 미덕이므로, 완벽한 복수란 신이 주시는 기회랄까, 그래서 복수를 할 수 있다면 신의 계시와도 같을것이다. 이 복수가 정당하다는 신의 계시)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난것들은 희미해져서 어떤것은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몇가지는 아직 남아있고 몇몇이 나의 적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사실 내 인생에 다시 보기 힘들 인물들이긴 하다. 예를 들어 중학생때 나를 밀어 넘어뜨린 남자애.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 그러나 마음속으론 아직도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있다. 내 성격이 이런 성격이다. 가만생각해보면 초등학교때 나를 놀린 남자애의 얼굴도 아직 기억에 남아있는것 같다...
여하튼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 안의 가장 큰 적은 나의 어머니이다.
나르시시스트인 나의 어머니. 어릴적부터 나를 자신의 우월감의 도구로 삼아온 사람.
우리 가정의 '암묵의' 룰은 어머니가 중심이고 어머니의 기분에 따라 앞으로의 모두의 행복이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편 나는 반항적이면서도 순종적인면이 함께 있는 성격으로, 정의에는 순종적이고 정의가 아닌것엔 반항적이었다.
엄마의 기분에 따라 모든것이 정해지고, 내가 말을 따라야 하는것은 정의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엄마에게 맨날 정서적 학대를 받았다. 정서적 학대라고 하는것은, 엄마에게 '애정어린' 욕을 먹은것도, 나에게 엄마가 맞다는 타당한 이유를 위한 훈육도 받은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신병자에다가 정서불안, 멍청이, 천성적으로 이상하고 어두운, 피해망상이라는 말을 초등학교때부터 들었다. 나보고 정신병자라면서도 피해망상이라면서도 나에게 옳은길을 가르쳐준적이 단 한번도 없다.(그리고 나에게 사과한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엄마는 화내는 이유가 옳은길, 옳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단지 자기가 '싫다'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엄마의 행동은 자기가 우월함을 느끼는 방향을 추구했다. 나쁜짓을 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것도 좋아했다. 내가 논리적으로 엄마가 틀렸음을 말하면 '니가 다 옳은줄 알지?'이러면서 '상식'과 '공정'을 넘어 '자기 기분'도 '맞을 수 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다' 는 논리를 펼쳤다. 상식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합리적인것이다. 그래서 어린 나는 그걸 배워서 엄마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엄마는 상식은 상관없고 자기맘대로 하는것에 내가 억지로 따르는것도 '옳다'는 것이었다. 자기멋대로 하는 엄마에게 상식을 말하는 나보고 너는 '잘난척', '자기 고집', '자기만 옳은줄 안다' 라고 한다... 엄마의 논리는 사실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자신이 이기고 싶을 뿐. 그러니 애초에 엄마는 나에게 옳은게 무엇인지 말할 수 조차 없었으며 그저 내가 피해망상이라서 혼자만 맞다고 우기면서 잘못생각하고 있다고 가스라이팅을 하는것이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꼭 니가 문제다' 이것도 내가 많이 들은 말이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나는 스스로 '이상한' 아이라는 자의식이 있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게 다 잘못된것이고, 나는 피해망상이 있으며 나의 도덕관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라는 엄마의 말때문에(초등학생때 들은 말들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져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트러블이 생겼다. 나는 당연히 소심해졌다. 워낙에 엄마가 드세서 나는 기를 필수가 없었다. 나는 가족 중에 왕따였고, 늘 상 굳이 엄마한테 반항해서 싸움을 만들어내는 트러블 메이커였으며 엄마의 말로는 '너만 없으면 우린 행복해'라는, 없어져야할 사람이었다.
여하튼 그리하여... 나는 우울증도 심했었고, 어릴적부터 괴로운 일이 많았다. 나는 피해망상자라고 진심으로 스스로 생각했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피해망상이란걸 숨기기 위해 내 주장을 하지 않는 일도 많아졌다. 내가 피해망상이라면 무슨 말을 해야 옳단 말인가? 내 생각은 뿌리부터 틀린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를 용서하기가 힘들다. 지금도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산더미처럼 쌓인 분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한편 지금도 어머니는 내 성격이 이상함을 이유로 자신의 잘못은 사실 큰 잘못도 아닌데 내가 우울증에 걸리게 된건 내가 너무 나약하거나 이상해서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말이 나에게 고통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엄마는 정상인데 내가 이상해서 아무것도 아닌 엄마의 말들에 내가 혼자서 우울증에 걸렸다는 주장이다. 엄마말에 따르면 '엄마같은 사람 밑에서 너같이 되는 애도 있겠지만 , 정상적으로 크는 사람도 많을거다'라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 심하게 대한게 있다면 다 나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어른이 되어 내가 정신과 상담을 받고 정신적인 용기를 얻은 후 정신과 선생님까지 관여하자 그제서야 어머니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게 되었는데 그전까진 '절대 너한테 사과할 일은 없어'라고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선언했었다.(이 비웃음이 날 강하게 키우기 위해 나한테 나쁜말을 했다고 한다는게 새빨간 거짓말인 증거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해놓고 나에게 내가 피해망상이라며 뒤집어 씌우고 가스라이팅 하는것은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리고 사과하라는 내말을 비웃거나 경멸하거나 언제나 우월감을 가득담아 다른 무시하는 말을 하곤 했다. 뭐가 그렇게 엄마 마음속에서 스스로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은것인지, 그리고 나는 절대적으로 틀렸고 쓰레기인건지 나는 알 수 없음이다. 내 짐작에 성격적으로 자신이 우월하다는 늬앙스인데(거의 80%), 내가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나는 그 논리를 탈탈 무너뜨려줄 예정이다. 어머니처럼 '자기보다 약한 사람은 일부러 가학적으로 괴롭히고 자기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순진한척(심지어 내가 보고있는 눈 앞에서까지) 하는 성격'이 뭐가 좋냐고 나중에 말해줄 참이다. 근데 이제까지의 행동으로보면 아마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것 같기도하다. 이제까지 내가 엄마에게 뭐가 문제였는지 지적해서 말하면 '니가 다 옳은줄 알지?' 라고 하거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미안' 한번 말하고 끝이었다. 그리고 사과했으니 모든게 끝이고 잊으라고 한다. 다시 과거 끌어내지 말라고 화내면서.
이 얼마나 졸렬한 가족사인지... 어디가서 부끄러워서 말하지도 못한다. 어머니는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대놓고 함으로서 자신이 교활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일부러 잘못해놓고 그걸 숨기지 않는다는것을 증거로 자신은 교활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렇게 나쁜사람이면 숨겼을거라고, 더 교묘히 날 괴롭히고도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다. 잘못된 행동을 대놓고 하는것. 대놓고 함으로서 '모르고' 나쁜짓한것처럼 되는것. 그것은 수준 높은 교활함 축에도 못낀다. 설명만 한번 해주면 다들 이해할 교활함인데 엄마는 자신이 고단수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순진한 난 얼마든지 속여넘길수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 내가 안 속아넘어가는 단계에 이르렀음에도 자신은 순진한척 하려고 끝까지 이 '모르는척' 전략을 유지중이다. 그동안 나를 비웃었고, 온갖 교활한 말로 가스라이팅을 하고서도 자신은 교활함이랑 거리가 먼 성격 좋은 사람인양 한다. 이제껏 나에게 그리 행동해놓고 대놓고 기만하는 태도다. 언젠가는 이런말도 나에게 했다. '모든게 밝혀져도 누구도 신경안쓸걸. 누구도 너 안도와줘'라고.
그러나 오늘 말씀을 읽으니 역시 용서를 해주어야 하긴 하는것 같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쉽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것은 어렵다.
죄있는자를 용서하는것이 용서이지, 죄없는자를 용서하는것은 용서하는것이 아니다.
성경의 말씀은 나의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고 있다.
나도 이 말씀으로 타인들에게 사람들을 용서해주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의 죄를 이미 모두 용서해주셨는데도 말이다.
티없이 깨끗하신 하나님은, 엄마와 똑같이 죄많은 나를 용서하셨을것이다.
그러니 나도 용서해야한다. 그것이 정의다.
사실 나는 내 잘못도 나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편이다. 남은 용서하지 못하면서 나를 스스로 용서하는것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학하고는 하는것 같다.
그러나 이제 용서를 진짜로 해보려고 노력해야겠다. 그것이 정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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