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2
Numbers 12
오늘은 감기가 더 심했다. 그래서 결국 병원에 가서 링겔을 맞고 돌아왔다. 그리고 항생제도 먹었다. 저녁이 되니까 좀 나아졌다. 아직 몸이 몽롱하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내가 튼튼할 줄 알았는데.... 병원에 가지 않아도 자연회복이 빠르게 될 줄 알았는데... 왜냐하면 나는 뭔가 자신감이 있었던것이다. 평상시에 감기가 걸려도 그다지 심하게 앓은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아닌모양이었다. 아주 센 감기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센 감기도 이겨낼 수 있을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자연회복으로 하루만에 치유될 줄 알았는데 .... 이렇게 더 심해지다니 병원의 고마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뭔가 아쉽다. 여하튼... 이렇게 근자감을 가지면 안된다. '근'거없는'자'신'감'.
모세가 비방을 받았는데, 구스 여인을 데려왔다.
민수기 12장에서 모세가 구스 여인을 데려온 이유는 성경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아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가능한 해석과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구스 여인의 정체
- 구스는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지역, 특히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또는 수단을 가리키는 지역으로 여겨집니다.
- 구스 여인은 모세의 두 번째 아내로 보이며, 이는 출애굽기 2장에서 언급된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미디안 여인 십보라와 구별됩니다.
- 십보라가 사망했거나, 모세가 다시 결혼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 일부 학자들은 구스 여인과 십보라가 동일 인물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구스와 미디안은 지리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 해석은 다소 논란이 있습니다.
2. 왜 모세는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가?
성경은 이 결혼의 이유를 명시하지 않지만, 몇 가지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1) 사랑과 개인적인 선택
- 구스 여인과의 결혼은 모세의 개인적 선택일 수 있습니다.
- 모세는 출애굽 이후 다양한 민족과 접촉했으며, 구스 여인과의 결혼은 당시의 사회적 혼인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2) 정치적 또는 외교적 이유
- 고대 근동에서 혼인은 종종 정치적 또는 외교적 이유로 이루어졌습니다.
- 구스 지역은 이스라엘과 가깝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이동하던 시점에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를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과 섭리
- 모세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 하나님은 민족적, 인종적 경계를 넘어 선택된 자를 사용하신다는 메시지를 나타내기 위해 구스 여인을 모세의 아내로 삼게 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3. 모세와 구스 여인 결혼에 대한 논쟁
민수기 12장의 핵심은 구스 여인과의 결혼으로 인해 모세의 형제인 아론과 미리암이 불평을 제기한 사건입니다.
- 미리암과 아론의 불만
미리암과 아론은 구스 여인과의 결혼을 비판하며, 모세가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독점적인 권위를 갖는 것에 대해 도전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만 통해 말씀하셨느냐? 우리도 통해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민수기 12:2)
- 이는 단순히 결혼 문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모세의 영적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합니다.
-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은 모세의 권위를 인정하며 미리암과 아론의 비판에 대해 즉각 개입하십니다.- 미리암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문둥병에 걸립니다.
- 이는 모세가 하나님의 특별한 지도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며, 그의 선택에 대한 비판이 정당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4. 신학적 해석
모세와 구스 여인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에 대한 수용
- 구스 여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외국인으로 보이며, 이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특정 민족에 국한되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 이 사건은 나중에 신약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두 하나이다"(갈라디아서 3:28)는 메시지를 미리 보여주는 사례로도 해석됩니다.
2) 하나님의 선택과 권위
- 이 사건은 모세가 하나님의 특별한 대리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선택과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비판(구스 여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큰 계획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임을 나타냅니다.
3) 교만과 겸손의 대조
- 민수기 12:3에서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합니다.
- 미리암과 아론의 교만한 태도와 대조적으로, 모세는 자신의 결혼 문제나 지도자적 권위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 이는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는 성경적 원칙을 강조합니다.
5. 결론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이유는 성경에서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사랑, 정치적 이유, 또는 하나님의 섭리 등 여러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모세의 개인적 결혼 이야기를 넘어, 하나님의 권위와 섭리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 하나님은 인종적, 민족적 경계를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은 인간의 기준과 판단을 넘어섭니다.
- 겸손함과 순종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시키시는것이 속시원할때도 있다. 겸손한 사람인 모세를 비방하는 미리암과 아론앞에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어 '모세는 다르다'라고 말하시니 얼마나 속시원한가. 한편 미리암은 뭉둥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아마 미리암이 더 죄가 커서인듯 하다.성경에서는 왜 미리암만 병에 걸렸는지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요즘 내 경험에 따르면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고, 그래서 징벌을 더 크게 받는 사람이 있다면 실제로 죄를 더 크게 지었기 때문이다.
난 최근에 내가 얼마나 교만한 사람이었는가를 깨닳았다. 나는 남들보다는 선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늘 상 나는 '강박증'을 겪었는데 그 강박증은 좋은일이 있어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잔인한일을 생각하고, 타인의 고통을 증가하는 방향으로 생각하는것이다. 이 강박증은 진짜, 왜 강박증이냐면 내가 정말 부정하고 싫어하더라도 끊임없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 왜 자꾸 나쁜 생각이 드냐고 끊임없이 여쭈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쁜 생각을 할거면 차라리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도 생각했다. 어짜피 불교에서는 생각을 비우라고 하고 ... 그래 생각을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했었따.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전략이었다. 생각을 안하니까 바보가 되는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보가 되었다.... (!)
지금은 답을 낼때까지는 다시 생각을 하려고 하는 중이다. 그런데 생각을 억제하던 버릇이 생겨서 고치기가 쉽지 않다.
여하튼 강박증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일깨우시는 무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너는 자만하고있다.' 라고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것이다. 그리고 정말 20여년이 걸려서 나는 부정하고 부정하다가 마침내 인정하게 된것 같다. 나는 겉으로, 행동으로는 선량한척하지만 마음속 깊숙한곳에는 누구보다도 사악한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내가 우울증에 걸렸던게 아닌가 싶다. 정말 깊은 우울증을 말이다. 나의 죄 때문에 나 스스로 우울증에 걸렸다. 그러나 치유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애초에 내가 내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진실을 대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안의 악을 대면하는것을 두려워해서 회피를 한다고 한다. 자신이 사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니 이중인격이 되어 자신을 분열시키기도 하고, 실제로 조현병에 걸리기도하고, 자살을 하기도 한다. 조현병에 걸린 사람들 중에는 '죽어'라는 환청을 듣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혹은 욕을 듣기도 한다. 대체로 부정적인것이고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왜 병증이 있는 조현병 환자들은 부정적인, 악랄한 환청을 듣는가? 왜 그런것들만 떠오르는가. 미묘한 일이다. 조현병은 도파민과 관련되어있는 병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은 아직 구명되지 않았다. 나는 우울증으로 인한 조현병 증세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리스페달이라는 약을 먹었는데 확실히 요즘 약이 좋더구만. 그 약을 먹으면 현실에서 도피가 가능하다. 그 대신 도피하게 되므로 인생에서의 문제들을 '일부러' 내가 몰두하지 않으면 그것들마저도 회피하게되는것 같다. 그리고 참고로 내가 몰두한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하는데에 3배정도는 더 노력이 필요한것 같다. 그래서 금식을 할때 약을 일부러 안먹고 금식을 하며 기도를 하면서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곤 했다. 내 우을증의 근원... 그것은 아마도 애증... 그러나 답은 절대로 안나온다.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것들은 포기해야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것이 내 안의 '악'과 그것의 회피에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히려 내 안의 '악'을 인정하고나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생각도 있다. 이제 시작이지만, 여하튼 나는 내 안의 악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교만했는지도 인정하게 되었다. 내 안의 악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 교만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모든일에 진실해져야하는것이다. 그리고 성실해야한다. 도피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거짓말하지도 말고, 꾸미지도 말고 자신의 마음을 진실되게 바라봐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병에 걸린다.
다시 돌아와서 조현병 환자들 중 부정적인 단어가 끊임없이 환청으로 들리는 것과 같은것은 어쩌면 그들이 악을 회피하기에 오히려 그 악이 더 살아나 실제로 들리는 수준까지 이른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아서 정말 안타깝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신병증이 있는자들에게 더 특별한 사명을 내리신게 아닌가 싶다.
자신을 속이며 살아도 살아지는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그들이 왜 벌을 받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들과 다르게 나는 정말 심하게 벌을 받았다고 느끼는데, 이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심하게 대함으로서 내가 사람들을 돕게 되길 바라신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 중 회복한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을 상담해주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나중에 나도 나아지면 그것을 좀 신청해볼까 한다.
그리고 목사님이 그러시길 자신은 예전에 기독교인이 우울증에 걸리는것은 잘못된것인줄 알았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잘못되었다. 우리 인간의 의지는 너무나 약하다. 사탄이 우울증을 보내면 인간은 무너지기도 한다. 우울증의 근원이 인간의 자신의 죄로 인한것만이 아닌것도 있다. 자기 죄에 자기가 넘어지는것, 하나님을 똑바로 믿지 않고 잘못믿어서 우울증이 올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똑바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많겠나? 적겠나? 그들은 소수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잘못믿고있다. 이게 평균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고치는데에는 많인 시간이 걸림도 인정해야한다. '합리적인 생각', '논리적인 생각'으로 잘못된 믿음을 고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이 주시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이 적은자들에게도 비교를 한다거나 비난을 하지 말라고 한다.
사탄이 불어넣는 우울증도 존재한다. 정말 가만히 있는데 악한 생각이 자꾸 떠오르고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생각을 자꾸 하고, 의심이 생기고 하는것들 중에는 내가 한 생각도 있지만 사탄이 불어넣은 생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탄이 작정하고 사람을 흔들때 그들이 방어를 성공한다고 장담하기 힘들다. 사탄은 인간을 죽이기도 한다는 모양이다. 힘만으로 봤을때 인간이 사탄을 이길수는 없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인간마저 사탄이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사탄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린것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것일 수도 있다. 그런식으로 우울증에 걸린 인간은 특별하게 사명을 가지고 우울증에 걸린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결국 이겨내길 바라신다. 그럼으로서 무언가를 가르쳐주시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로 긴 우울증에서 일어서는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우울증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모를것을 그들은 알 수 있게 된다. 인생에 대한 깊이 자체가 다르다. 어려움을 이겨내는것인가, 어리석어서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는것인가... 우울증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우울한 마음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걸로 만들어버리면 되는데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너무 중요시하고 집착하며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겪어보지 못했고 그래서 이해하지 못한다. 꺾이고, 꺾이고, 꺾이고, 또 꺾이고, 꺽이다보면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것을 느낀다. 그리고 희망이 없어지면 사람의 영혼은 죽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희망을 놓지 말아야한다고 비난할수도 있다. 그래서 믿음이 작은것이라고 비난할수도 있다. 잘못믿는다고도 비난할수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로 인간은 초인적으로 노력해도 부숴질수 있다. 인간이 의지로 노력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것이 존재한다. 오직 성령님이 함께해야만 이겨낼 수 있는것이 있다.
우울증을 겪다보니, 사람의 마음은 정말 종이한장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살아있는것과 죽은것도 종이한장 차이였다. 단 한번의 행동만 하면 나는 살아있거나 죽어있게 된다. 그 행동을 행하느냐 마느냐가 종이한장 차이였다. 너무나도 얇고 가느다란 막.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 죽음을 자꾸 생각하다보면 죽은것과 살아있는것이 구별이 가지 않게 된다. 그 구별이 없어짐에 따라 '똑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마음이 마침내 한쪽으로 약간이라도 기울게 되면 순식간에 죽음이 결정되는것이다. 우울증이 심해져서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의 심리를 일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애초에 깊게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것을 알기에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삶과 죽음이 구별가지 않는 상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오랜시간 수행하여 해탈한자들이 삶과 죽음을 평등하게 바라보게 된다고도 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그러나 그 상태가 된다. 매우 위험할수도 있는 상태로. 왜냐하면 수행으로 삶과 죽음을 평등하게 바라보는이들은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토대 위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삶과 죽음을 대한다. 그러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살생이 가능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은 가치가 0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확신이 생긴다. 결론이 내려지는것이다. 나의 목숨은 가치가 0이고, 삶과 죽음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이 확실해진다. 그 다음에는 선택만이 남는것이다.
나는 이 선택이 확실시 되었을때 성령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살아있는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살아있는것이 종이한장차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종이한장차이로 내가 살아있는것이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으면서 하나님의 속삭임같은게 느껴지는것 같다면 그것이 믿어지기도 한다. 여전히 의심은 있지만, 믿음이 더 높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하튼 말이 샜지만, 내가 교만한 사람임을 깨닳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울증을 겪게 하신것이라 생각된다. 인정한다. 나는 교만했고 그래서 우울증에 걸렸다. (나의 경우라는 이야기다. 우울증에 걸린 모든 사람이 교만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이 인정되자 , 믿어지자 마음에 자유를 얻게 된 기분도 든다. 이전에는 내가 왜 우울증인지 도무지 모르겠었으나, 왜 나에게 이런일이 연속해서 나쁜일만 생기는가? 분노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 수그러들었다. 나보다 악해보이는 이들이 왜 나처럼 벌을 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사는가에 대한 분노에도 어느정도 답이 된듯하다. 내가 교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사악한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여기에 대해서 더 깊은 생각을 해야할 듯 하다. 그러나 논리로는 , 이성으로서는 절대 답을 낼 수 없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논리와 이성으로 절대 해결되지 않는것과 같다. 믿어져야한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소중이 하라는 명령이 믿어져야 해결됬듯이. 불교에서도 그랬든, 삶은 고통이다. 살아서 행복보다 고통이 더 크다. 일종의 징벌과도 같다. 지옥과도 같다. 논리적으로는 나같은 사람의 삶은 고통이 더 크니 죽음이 답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면 죽음이 아니라 삶을 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삶의 목적이 내 행복이 아니며, 고통을 피하는것이 아니며, 의미를 찾는것이 아니게된다. 사실 삶에 목적자체가 없어도 된다. 그냥 믿음으로 살아있게 되는것 같다. 그래서 삶이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하는것이다. 우울증으로 인해 죽음에 가까이 갔던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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