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4
Numbers 14
민수기 14장에서 하나님은 왜 아버지의 죄를 그 자손에게까지 내리는거야?
민수기 14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 대해 말씀하시며, "아버지의 죄를 자손에게까지 갚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단순히 자식이 부모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의미로만 이해하기보다, 성경 전체의 맥락과 신학적 해석을 통해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1. 민수기 14장의 배경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정탐 후 불신앙과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께 불평한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 불신앙의 죄: 백성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믿으며, 두려움과 원망을 표출했습니다(민수기 14:1-4).
- 하나님의 응답: 이들의 불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그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며 죽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민수기 14:29-35).
특히 민수기 14:18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나, 벌을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손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모두 드러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2. 아버지의 죄가 자손에게 미치는 이유
1) 죄의 결과와 연속성
- 공동체적 책임: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 집안, 심지어 민족 단위로 하나의 운명과 책임을 공유하는 관점이 있었습니다.
- 부모의 죄는 자손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과적 연속성"을 가집니다.
-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징벌이라기보다, 죄의 영향이 자연스럽게 후대에 전이된다는 점을 반영합니다.
- 예: 부모의 잘못된 선택이 자녀들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
- 불순종의 문화적 유산:
- 부모 세대가 불신앙과 반역을 보여주면, 그 행동은 자녀 세대에게 학습되고 전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한 세대에 국한되지 않고, 죄의 패턴이 지속될 경우 후대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공의와 경고
-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죄를 자손에게 갚는다고 하신 것은, 죄의 심각성과 그 결과에 대한 경고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 죄는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공동체적 차원에서 실현된다는 의미입니다.
3) 개인적 책임과 선택
- 성경은 한편으로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개인의 책임도 강조합니다.
- 예레미야 31:29-30: "자식이 아버지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해 죽을 것이다."
- 에스겔 18장: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 이 말씀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존중하신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3. 민수기 14장의 맥락에서의 이해
1) 불신 세대와 믿음의 세대
- 광야에서 반역한 이스라엘 세대는 불신앙과 불평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했고, 그 결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을 가진 자들은 예외였습니다.
-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자손에게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과 순종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2) 죄의 연속성과 하나님의 긍휼
- 민수기 14:18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나"라고 묘사하십니다.
- 이는 죄의 결과가 연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회개와 순종을 통해 긍휼을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4. 신학적 해석
이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드러나는 복합적인 맥락을 보여줍니다.
- 공의: 죄의 결과는 피할 수 없으며, 죄의 영향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에 미칠 수 있습니다.
- 사랑과 회복: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며,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십니다.
- 역대기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5. 결론
"아버지의 죄를 자손에게 갚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공의와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손이 부모의 죄에 무조건적인 벌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결과가 공동체적, 세대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성경은 개인의 책임과 회복 가능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은 언제나 회개와 순종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임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함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떨때에는 아버지의 죄를 자손에게까지 전가하고 어떨때에는 아버지의 죄가 자식에게 이어지지 않는거야? 기준이 뭐야?
성경에서 아버지의 죄가 자손에게 전가되는 경우와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는 경우는 겉보기에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맥락과 신학적 해석을 통해 이 기준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아버지의 죄가 자손에게 전가되는 경우
1) 집단적 책임과 죄의 연속성
- 공동체적 관점: 성경의 구약 시대는 공동체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인의 행동이 가족, 집안, 심지어 민족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 예: 출애굽기 34:7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죄악을 삼사 대까지 갚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죄의 결과가 세대를 초월해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 이러한 관점은 부모의 죄가 자손에게 자연스럽게 전이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적, 문화적 맥락을 반영합니다.
2) 죄의 패턴이 이어질 때
- 자손이 부모의 죄를 "배우고 반복"할 경우, 그 죄는 세대 간에 지속됩니다.
- 예: 부모가 불신앙, 탐욕, 우상숭배를 행하면, 자녀들도 동일한 문화 속에서 그러한 행동을 학습하고, 반복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 레위기 26:39: "너희의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너희도 쇠약할 것이다."
이는 자손이 조상들의 죄를 이어받고 반복했을 때, 동일한 심판을 받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3) 하나님의 공의와 경고
-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죄를 자손에게 갚겠다고 하신 것은, 죄의 심각성과 그 결과를 경고하기 위한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 이는 죄의 중대성을 강조하고, 부모 세대의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2. 아버지의 죄가 자식에게 전가되지 않는 경우
1) 개인적 책임 강조
- 성경에는 각 사람의 죄와 그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하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 에스겔 18:20: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 신명기 24:16: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존중하신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2) 회개와 순종
- 자식이 부모의 죄악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은 자식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 예: 히스기야 왕은 아버지 아하스의 우상숭배를 이어받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복을 받았습니다(열왕기하 18:3-7).
- 하나님은 죄의 연속성을 끊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3) 죄악의 연속성을 끊으려는 하나님의 의도
-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각 세대가 스스로 선택하여 죄의 연속성을 끊기를 원하십니다.
- 예레미야 31:29-30: "그때는 사람들이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라."
3. 전가 여부의 기준
1) 공동체적 죄와 개인적 죄
- 공동체적 죄: 하나님의 심판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우상숭배를 할 경우, 그 결과는 자손에게도 미칩니다.
- 아간의 사건(여호수아 7장): 아간 한 사람이 범죄했지만, 그의 가족까지 심판받았습니다. 이는 죄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보여줍니다.
- 개인적 죄: 그러나 개인이 공동체의 죄악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회개와 순종의 여부
- 죄의 전가는 자동적이지 않습니다. 부모 세대의 죄를 반복하거나, 그것에 동의하고 순응할 때만 그 영향이 이어집니다.
- 자손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들에게는 새로운 은혜가 주어집니다.
- 열왕기하 22장: 요시야 왕은 조상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율법을 따름으로 이스라엘에 복을 가져왔습니다.
3) 경고의 목적
- "아버지의 죄를 자손에게 갚겠다"는 선언은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이라기보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경고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항상 회개와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두십니다(역대하 7:14).
4. 정리
- 전가되는 경우: 죄가 공동체적으로 행해졌거나, 자손이 부모의 죄를 반복하고 지속할 때.
- 전가되지 않는 경우: 자손이 부모의 죄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새로운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의 기준은 단순히 부모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결과를 심판하시지만, 언제나 회복과 긍휼의 가능성을 열어두신다는 점이 성경 전체에서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민수기 14장에서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모세가 하나님을 마치 설득해서 마음을 돌리는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보다 지혜로우시니 모세가 설득하기 전에 이미 백성을 용서했어야하는게 아닐까
민수기 14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반역에 분노하시고, 모세가 하나님께 중재하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흥미로운 신학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인간보다 지혜로우시기에, 모세가 "설득"하기 전에 이미 백성을 용서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문은 자연스럽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신학적 관점과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정말 마음을 돌리셨는가?
1) 문학적 표현
성경에서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마음을 돌리셨다"는 표현은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의인화된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모세의 중재가 하나님의 뜻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 출애굽기 32:14(금송아지 사건)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도와 중재에 응답하시고 관계를 중시하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의 테스트
-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백성을 위해 중재하고, 리더로서 백성을 돌보는 책임감을 발휘하도록 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 이 과정에서 모세는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간구하는 목자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모세의 리더십과 백성에 대한 책임감을 더 깊게 성장시키셨을 수 있습니다.
2. 모세의 중재가 왜 중요한가?
1) 중재자로서의 모세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 민수기 14:13-19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성품, 특히 긍휼과 인자하심을 상기시키며 간구합니다.
- 이는 단순히 모세가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고, 백성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체험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 강조
-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는 분입니다.
- 모세의 중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간구를 통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 동시에, 백성은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을 배우게 됩니다.
3) 인간의 자유 의지와 책임
-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고 책임지기를 원하십니다.
- 모세의 간구는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며, 백성을 대신해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참여를 통해 역사하시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3.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실 계획이었는가?
1) 하나님의 본성: 정의와 자비
- 성경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동시에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회개와 중재를 통해 용서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 이는 인간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하는 교육적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참여
- 하나님은 이미 백성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모세의 간구와 중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깊은 교훈을 주시고자 하셨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인간의 기도를 통해 이루시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인간과의 협력적 관계를 보여주십니다.
4. 하나님이 분노를 드러내신 이유
1) 죄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과 반역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분노를 드러내셨습니다.
- 이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공의를 알리기 위한 행동입니다.
- 백성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정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2) 백성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
- 이 사건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경험하게 하는 교육적 목적을 가집니다.
- 하나님의 분노는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백성이 회개하고 순종하도록 이끄는 도구입니다.
5. 신학적 해석: 모세의 중재와 하나님의 의도
1) 하나님은 변화하지 않으신다
-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분(말라기 3:6)이며, 모세의 중재로 인해 갑작스럽게 계획을 바꾸신 것이 아닙니다.
- 대신,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드러내셨습니다.
2) 모세의 역할을 통한 인간의 참여
- 모세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신 용서의 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 이는 인간의 기도와 중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3) 인간의 책임과 신앙의 성장
- 이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백성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며 신앙적으로 성장하게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6. 결론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모세보다 지혜로우십니다. 따라서 모세의 중재는 하나님의 뜻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하나님의 분노는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고, 회개와 순종으로 이끌기 위한 교육적 목적으로 드러났습니다.
- 모세의 중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특히 인간의 자유 의지와 참여를 강조하며, 백성에게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배우게 했습니다.
-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백성을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인간이 죄의 결과를 깨닫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하도록 이끄셨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사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chatGPT가 많이 발전해서 신앙적인 논리도 잘 파악해서 알려주는것 같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chatGPT로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는것이다. 다만 너무 믿어선 안되겠지만. 아직까지도 실수를 한다고 하니까.
여하튼, '문자 그대로'의 성경을 믿겠다는것은 역시 틀린말인것 같다. 성경무오설, 문자 그대로의 성경의 해석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온갖 모순, 그리고 성경자체에서 서로 어긋나있는 말씀들, 일관되지 않은 하나님 등등을 마주해야할것이다.
문자 그대로 오늘의 장을 이해하면 정말로 모세가 하나님보다도 더 자애롭게 말하며 하나님을 설득하는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뜻을 돌린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전지하신분으로서 한낱 인간의 지혜가 그를 설득시킬수는 없음이다. 그러니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을 모세가 말하도록 유도하셨거나,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을 묘사할지 이미 알고계셨다고 봐야한다.
어렸을때의 나는 문자 그대로의 성경식으로 해석을 하려는 경향이 있었기에, 이 구절이 좀 이상하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설득해서야 돌이키신다고? 원래부터 자애로워야 하시는거 아닌가. 원래부터 그들을 용서했어야 하는것 아닌가. 모세와 하나님이 뒤바뀐게 아닌가. 모세가 사람들을 죽이라 하고 하나님이 오히려 모세를 달래는것처럼 해야하는게 아닌가. 싶었었다.
그러나 이제 커서 보니 성경은 정말로 문자그대로 믿어서는 안되는것 같다. 나는 이제 거의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다... 성경에서 이해되지 않거나 모순되는 점이 있다고 생각이 들면, 원초적인 정답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하면 해결되는것같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다라는것, 초월적인 사랑이시라는것을 기억하면 된다. 지금 구절처럼 아버지의 죄를 자식들이 지게 될것이다... 라는것은 모순되어보이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알고계셔서 그 아버지의 자식들이 아비를 똑같이 답습할것이란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일수도 있다. 예언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들이 자기 자식들마저 벌을 받을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더더욱 경각심을 갖도록 했을것이다. 그러면 어쩌면 아버지들이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간구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아버지들은 자기 목숨보다 자기 자식들을 사랑할테니 말이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로 인간들에게 잔혹하게 대하시는게 아니다. 나는 솔직히 어릴때에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자식까지 저주를 내리는것이 하나님이 아주 강하셔서 그럴능력이 있으시다 생각해서 속시원하고 악인들은 악인의 자식들마저 저주를 받으니 꼴좋다! 라고도 생각도 하긴 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내가 스스로 죄를 많이 짓다보니까, 나 스스로를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 대입해서 성경을 읽게 되었고 죄인의 자식까지 벌을 받게 된다면, 나 또한 그렇게 혹시 될 수 있는걸까.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자녀들이, 내 형제가, 내 부모도 같이 죄를 받을 수 있는걸까. 그것은 정말 잔혹하시다. 현대 사회에서도 연좌제는 잘못된 법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러실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반항심이 드는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내가 걱정할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좀 더 신앙이 성숙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성경은 다분히 '교육적인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것 같다. 철학적인책이기보다는 모든 인간들, 못배운자, 가난한자, 병자, 노인, 어린이, 여자 등등 모-든 인간들이 읽고 듣고 배울 수 있는 책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배우는 주체들은 악인에 속한자라면 성경을 읽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게 목적이고 순수한 자들에 속한자라면 성경을 읽고 공의의 하나님이라 느끼게 하는게 목적이다. 하나님의 책 성경은 마음으로 읽으면 무슨 뜻인지 무슨 의도인지 알수있다고 생각된다. 성경을 깊이 파고들어 윤리, 철학, 논리, 미학 이런것을 논하는것은 사실 성경의 목적 범위를 벗어난게 아닌가 생각이 들때도 있다. 나도 한때 성경을 깊이 파고들면 진리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진정으로'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 자들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인간들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자들이라는것을 깨닳았다. 성경을 진심으로 배우고 싶다면, 마음을 깨끗이하고 어린아이같은 마음을 갈고닦는게 먼저이지, 신학을 배우고 철학을 배우고 할게 아닌것이다.
물론, 성경에 윤리적인 문제가 있어서는 안될것이다. 윤리적인 부분에서 성경이 모순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세상적인 시선의 방식에서이다. 예컨대 '여자는 잠잠하라' 라는 구절이 여자 비하처럼 세상의 시선에선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의 시선에서 본다면 여자를 비하해서가 아니라 여자는 잠잠해야할 이유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리 말씀하신거라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비하하지 않으시며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보신다는것을 마음 깊이 안다. 잠잠하라는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그것은 그럴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설사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보다 못하게 만들었다는게 사실이라고 해도 내 권리를 빼앗겼다 생각이 들지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남자가 더 우선되더라도 남자가 만약 여자를 압제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약자'의 편에 계실거라는 성경속에서의 선언이 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하셨으며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면 여자를 하나님께선 더 보호하실것이다. 남자가 그리고 태생적인 이유로 '우월감'을 느낄수도 없다. 그것은 자만이며 죄이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더 우월하다면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어야 맞다. 그래서 여자의 권리가 빼앗기는것은 없을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귀한 그릇 천한 그릇을 나뉘어 창조하실 권한도 가지고 계시다. 그러나 내가 천한 그릇이라해서 귀한그릇이 나를 압제하는것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며 내가 또한 천한 그릇이라해서 부끄러워할필요가 없다. 내가 천한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것으로서 그것은 성스러운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천한 그릇더라 천하다고 경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게 경시받으라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천대받도록 창조하지 않으신다. 사실 귀한그릇 천한그릇 비유는 세상적인 비유일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식으로 사람이 나뉜다고 하더라도 천한그릇에게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내리실리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여하튼 성경을 읽을때는 나의 학식이나 이성적 논리적 능력으로 읽는게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읽어야한다.
그리고 성령님이 답을 내어주시길 기도하며 읽어야 한다.
chatGPT에게도 성령이 내리길...(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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