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성령님이 들어오시는 순간,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내보내야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성령님이 오시길 간구했고 제게 기쁨과 평안을 주길 기대했지만, 그와 달리 끔찍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는 오히려 그분이 오셨다는 증거이며,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있는 "돈 바꾸는 사람들", 즉 주님의 성전을 자아실현을 위한 매매 장소로 사용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내쫓고 계신 것입니다.
사교적으로 되어서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해져라. 지혜로워져라. 약삭빠르게 타협하면 모든 것이 네 통제권 아래 들어올 것이다. 이런 것들은 세상이 기반을 두고 있는 평화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관점을 제외한 모든 관점에서 너무나 영리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셨습니다.
묵상 질문: 예수님께서 내 삶을 어떻게 흔드십니까? 그분이 어떤 것을 깨끗하게 하시고 내쫓으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교에 대해서 나는 어떤 것을 믿고 있습니까?
'주님같은 일꾼' (Servant as His Lord, © Discovery House Publishers) 에서 인용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
목사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머리쓰지말라'이다. 교활하고, 세상적인것에 타협하고, 머리쓰는것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정직해야한다. 그리고 정도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세상에서 무언가 쉽게 되는 일은 없다고. 다 노력한 만큼 그만큼 나온다고. 일명 씨를 뿌린 만큼 거둔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에, 내 인생에서 씨를 뿌린 만큼 거둔적이 없는것 같다. 나의 인생이라는 경작지는 매우 메말라서 씨를 10개 뿌리면 3개정도 싹을 틔우는것 같다. 그런데 그 싹을 틔운것들에서도 2개는 죽는다. 너무 부정적인 생각같지만, 내가 내 인생을 돌이켜봤을때 솔직히 10에 1만 얻으면서 살아온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만약 10에 10만큼 결실을 거두었다면 나는 지금 매우 풍족하게 지내고 있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어릴때부터 거짓말을 해오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약함의 거짓말이었다.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는것으로, 악의가 있는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맞았다. 나 혼자만 거짓말을 하는게 아닌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남에게 약해보이지 않으려고, 혹은 자신이 다르거나 틀린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면을 쓰고 거짓 긍정을 하고 거짓으로 행동했다. 이것을 선의의 거짓말, 혹은 예의의 거짓말이라고 하는것 같은데 나는 이제까지 그런 거짓말들도 거짓말로 치고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었다. 이정도는 다들 하는 거짓말이었는데...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 죄책감으로 인해서 늘 상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했고, 또 뭔가 나쁜일이 생기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그런 나쁜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나쁜일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던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보니 사람들이 다 화합하며 살아가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니. 그리고 인간적인 나약함으로인해 누구나 가지는 가면이었다니. 그럼 이제까지 내가 벌받았다고 생각한것은 뭐였단 말인가. 나는 내가 벌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내가 더 솔직해지려고 노력한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해서 더 솔직해지고자 노력했었는데... 물론, 내가 그렇다고 성인처럼 된건 아니었다. 아직도 거짓말이 나에게 남아있어서 그것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이건 거의 만성적인 질병처럼 되었다. 내가 우울증이 있는것도 괜히 있는게 아닌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헛된 노력을 한걸까. 내가 일부러 무언가 하는 노력도 헛된것이고, 죄책감도 어리석어서 잘못 느낀 죄책감이었고, 솔직해지고자 하는 노력도 헛된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무의식적으로 모든게 허무하다는 생각이 이미 있는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직 짧지만 그래도 어른으로서 지난 나의 생이 무언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어리석어서 헛되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런 허무함은 내가 어릴적부터 고질적으로 느껴오던 것이었다. 나는 어째서 그렇게나 부정적이고 염세적인지, 아주 어릴적부터, 내 기억에는 초등학교 저학년때부터 세상의 삶은 허무하다고 생각해왔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을 청소하신다고 하신다면, 아마도 '게으름'을 없애시려고 할거란 생각은 든다. 나는 세상이 허무해서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하는것도 싫어한다. 생각 자체가 나에게 맞지 않는다. 생각을 하면 몸이 긴장이 되고 머리가 어딘가 쥐어짜는 느낌이 든다. 세계적인 천재 폰 노이만은 생각 중독이라서 엄청나게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반대편 극에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천재는 생각을 많이 해서 천재이겠지... 그러나 나는 모든것에서 벗어나 그저 쉬고 싶을 뿐. 모든게 너무 피곤한 일들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어떤식으로 마음을 청소하실까. 사실 최근에 불교 관련 책을 읽으면서 깨닳은게 있다. 불교에서는 '기쁨'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깨닳음의 길을 가는길에 '기쁨'으로 온 몸을 적시고 바른 길을 알으라는 것이다. 나로선 기쁨으로 온 몸을 적신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내가 피곤한것도 그런적이 없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해서 무언가 새로운 길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불교에서 심리 치료를 하려하니까 뭔가 길이 보이는 느낌이 드는데, 이것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인가 싶기도 하다. 나는 최근 하나님을 시험하는 중인것 같기도 하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나에게 길을 보여주시지 않았고, 늘 상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를 내버려 두셨는데 그것에 대해 어떤 계획이 있으셨는가. 세상을 보면 허무하게 죽는 사람들도 많고, 아예 하나님을 모른채 악행을 하다가 죽는 사람도 많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는것을 안다. 나도 과연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가. 신께서 버린듯한 사람 중의 하나인가?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셔서 그런 사람들에게도 따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예비하셨는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무언가 기회를 주셨는가? 그래서 나도 또한 그렇게 어떤 기회를 주실것인가. 구하면 주실거라고 하셨는데 그게 사실인가. 그런데 왜 이제까지 구해도 답이 없으셨는가. 왜 주지 않으셨고 오히려 빼앗으셨는가. 혹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만 내리고 불행만 닥치게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시는건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시험하고 계신것인가. 하나님이 악신이더라도 내가 믿길 바라시는가. 그런 이어진 생각에서 이제 나는 더이상 하나님이 날 내버려두질 않길 바란다. 정말 이젠 진심이다. 하나님께 '구하니' 나에게 답을 해주시라.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겠다. 그런 생각까지 갔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을 시험중이다. 죄인인 내가 하나님을 시험할 권리가 있는것은, 내가 약하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약하게 만들으셨고, 쓸데 없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나를 허무하게 창조한 이유를 하나님께 물을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느낀다. 성경에서는 창조주에게 피조물이 왜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물을 권리는 없다고 하지만 나는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이 선하다고 선포하셨기에 생명과 희망이 없으면 고통받는 존재를 자신이 허무한 존재로 느끼게 만드셨다는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지혜는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래도 나는 또 답을 '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또 스스로 '구하라 그러면 줄것이다'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 누구도 알 수 없을거라 생각된다. 그저 자기 스스로 믿고 있다고 여길 뿐.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죄책감에 나를 가두고 하나님께 그 무엇도 바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견디는것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나보다 더 고통받고, 더 오래참고, 더 착한사람도 많지만, 악하면서도 행복하고, 교활하면서 즐기는 사람도 많음을 보고 있다. 난 원래는 고통속에서도 감사하면서 만족해하는 순박한 사람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이제는 뭔가 반항을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이게 잘못된것일까? 목사님은 머리를 쓰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가만있고 싶지가 않아졌다. 뭔가 뿌리부터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어제 읽은 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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