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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version 묵상

240612 QT 선과 악의 기로

by one_soul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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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사람 VS 건짐받은 사람

- 묵상의 길잡이
사도바울은 선과 악 사이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건지셨음을 또한 고백합니다. 요즘 나의 고백은 무엇인지 잠시 돌아보고 말씀을 묵상합시다.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나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의 비참함을 토로합니다. (19, 24) 나에게 있는 중독적 성향이나 습관들을 중단하거나 끊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 결과는 어떠했나요?

당신에게 새롭게 형성되기 원하는 건강한 생활태도나 습관들은 무엇인지 적어봅시다.

- 한 걸음 더
내 안에 바울과 같은 내면적 갈등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 주신 주님께 나의 무력함을 내려놓고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합시다.

 

 

로마서 7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의 곤고함에 그리스도인들은 공감할것이다. 그는 실로, 솔직한 사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고뇌하는 것들을 자신이 스스로 고백함으로서 자신의 사도로서의 고귀함보다, 낮은자로서의 '가난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생각된다. 우리 기독교는 누구나 높아지려거든, 먼저 낮아져야 하고, 가난한 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가 가난하고 낮은 곳에서 남을 섬기는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닳고 또 우리가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음을 깨닳으면서 시작된다. 

 

아마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는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김 -> 믿음이 깊어짐 -> 믿음이 깊어져도 죄가 있음을 느낌 -> 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함 -> 이 과정에서 겸손한 마음이 생김 -> 스스로 낮은자가 되고자 함 ->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가난한 마음'을 갖게 됨 -> 더더욱 낮은 곳으로 향하며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함 -> 그러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함. 왜냐하면 나는 죄인이나,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되기 때문

 

나는 약간, 마음이 성장하는 순서가 있다고도 생각을 하는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좋은것만은 아니다. 어떤것은 순서 없이 순식간에 도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는 자신이 어느단계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서에 집착하면 한 단계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여하튼 나도 곤고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곤고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바울은 작은 죄도 등한시 하지 않았으나, 나는 하루에도 수십번 죄를 짓는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내 편의를 위해서 말이다. 운전을 하면서 앞에 끼어들기하는 차를 노려보고, 사람들 눈치를 보고, 하나님을 위한 기도 시간은 뗴어먹고, 내 죄를 돌아보지 않고.. 나는 실로 똑바르지 못하고 듬성듬성한 사람이라고 최근 깨닳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이렇게 QT를 하면서 뭔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고보니, 작게 축하 할 일이 있었는데 그냥 넘어간것 같다. 한 일주일 전쯤이었던가, 이주 전쯤이었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경 통독을 끝냈다. 

 

이제서야 1통독을 했으니, 이제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을 할 차례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다시 또 읽기가 약간 ... ㅎㅎㅎ

1회독 하는데... 도대체 몇년이 걸린건지.. 

여하튼 다시 시작할때는 그럼 QT를 동시에 같이 할까? 그러면 더 의미가 깊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작은 축하를 스스로 해본다. 이렇게 블로그에 좋은 소식을 올리니까 나도 기분이 좋다.

 

다시돌아와서...

 

내면의 갈등이... 과거에는 강하면서도 약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때에는, 잘못을 저지르면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은, 두려움이 좀 적어진것 같다. 그냥 될대로 대라는 식이 많은것 같다. 그러나 마음 깊은곳에서는 늘 두려워 함이 있는 것 같다. 그게 내 본성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이 올까?

사람들이 무언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생 2회차가 필요하다... 는 등의 말들을 하는게 이제 이해가 된다. 

그리고 또 혹은 '다음생에서나 가능해...' 라는 말. 

나도 점점 어떤 꿈들을 포기하면서 '천국에서나 가능해...'하고 생각하는 일들이 많아지는것 같다

어릴때에는 '언젠가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고 기도를 했었는데, 이제는 '이건 현실에선 불가능해...'라고 생각하면서 포기하게 된다. 그게 과연 옳은걸까? 아니면 하나님을 무시하는것일까?

지금은 나의 죄들이 심지어 운명적인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지은 죄들을 내가 운명에 따라 하나씩 겪으면서 그리고 시행하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 수많은 죄들에 대한 죄책감. 어쩌면 인간은 죄를 짓기 위해 태어난게 아닐까. 죄라는것은 운명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질투가 나서 또 죄를 짓게 되는것이, 어떻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순수한채로 남아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나쁜 생각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것일까?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고귀하게 순수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죄를 운명이라고 생각하는것은, 내가 타락한 징조인지도 모르겠다. 내 중심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세상에 순수한 존재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면 누구나 죄가 있다는 식으로 폄하하고 있다. 

만약 순수한 존재가 있다면 만나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내 영혼을 일깨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사실 , 내 동생의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를 보면서 인간이 태어났을때에는 정말로 순수하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아기는 모든것을 자신의 욕구대로만 행동할것이다. 이타심이라던가, 자기희생같은것은 없다. 그러나 그런 고차원적인것보다 오히려 아기의 솔직하고 순수한 자신의 욕구의 표출이 더 순수해보이는것은 왜일까. 자기희생을 하고, 이타심을 보이는 '성자'라고 하더라도 갓난 아이만큼 순수하진 못할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대로, 육신을 입은 이상 죄의 종이 되기 때문에 죄의 원리에 따라서 행동하는 시간이 늙을수록 많아지기 때문일것이다. 아무리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졌더래도 그동안 살면서 육의 죄를 범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아기처럼 순수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난지 몇개월 안된 아가를 보면서 그리고 나는 이렇게나 힐링이 되고 있다. 

순수한 존재를 접하면서 정말로 나는 그동안에 있었던 고통들이 한결 치유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우리 인간을 이렇게 가정을 이루고 살게 하셨는지, 왠지 그것이 '완성된 형태'라는 느낌이 들었다.

홀로 죽을때까지 사는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만들어두신 아름다움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나는 사실 아직 가정을 이루는것에 대한 느낌이 없다. 일단 내 사정이 결혼할 사정이 안됨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 불안하다. 나에게 만약 아이가 생기면 나는 그 아이가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동생의 아이만 봐도 한편으로는 두렵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데려가시면 어쩌지? 그러면 너무나 큰 슬픔에 덮쳐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 동생의 아이를 본지 이제 몇개월 됬는데도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아이도 살아가면서 죄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사랑으로 그 죄를 덮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사랑으로 아이를 키우라고 하시는것이다. 어짜피 제대로된 부모라면 아이를 무의식적으로 사랑하게 되어있지만 말이다. 

 

나는 근데 사실 가정적으로 정서 학대를 많이 당한편이다. 어른이 되고나서야 알았다. 

그러나 나는 가족과 절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어쩌면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가족만이 그나마 타인보다 낫다는것을 느끼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정말이지 애증이다. 그동안의 진흙탕싸움은... 비극이라 생각된다. 나는 피해자라 망가졌는데 가해자는 자신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 된 상태다. 그것이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다 나의 죄 때문이라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그동안 지은 수많은 죄에 대한 응징을 받고 있는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동안 죄를 너무나 가볍게 여겨왔기에, 그것에 대한 응징을 받는것이리라...

물론, 아무리 죄를 지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왜 나만 응징을 받느냐 하나님께 묻기도 했다. 왜 가해자는 벌을 안받고 행복한가. 왜 가해자는 자기 죄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비웃는데 그들에게는 죄가 내리지 않는가. 사실, 불교로 치자면, 전생에 내가 죄를 많이 지은것이고 가해자는 내가 전생에 괴롭혔던 자였다고 생각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둘 다 평등하게 새로이 태어난 사람들인데, 왜 가해자만 행복한가? 그것에 대한 의문때문에 하나님을 버리려고도 했었다. 사실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답에 대한 가능성으로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지은 죄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가해자는 죽어서 지옥에 가는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란 생각으로 귀결된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욕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신다고 하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판결의 때가 오기 전에는 악한 사람들이 자기 정욕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시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연단하신다고 들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의 그 가해자는 나의 가족이다. 내 가족이 지옥에 간다는 뜻인가. 게다가 내 가족은 나와 같은 기독교다. 그러면 기독교이니까 예수님을 믿으니 천국에 가지 않겠는가. 거기서 또 의문이 든다. 자만심에 가득차 사람을 학대하기를 즐긴 기독교인도 천국에 가는가?

 

조금 멀리 떨어져서 생각하자면, 나보다 더 악한 사람에게 내가 당하면서 악이란 얼마나 강력한가, 악이란 얼마나 나쁜가, 피해자가 된다는것이 어떤것인가, 약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것인가에 대해서 내가 배울 수 도 있었다고 생각이 든다. 나같은 사람은 그런 악을 접하지 못했다면 평생 악은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든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악을 피하는데에 어느정도 도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악을 모르는척하는데 도가 텄다. 그것은 학대당하는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왠만한 악을 모르는척 하는데 도가 텄다. 다만 속으로는 응분을 가진다. 그리고 그걸 어쩔 수 없이 묻어둔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나에게 일부러 더 큰 악을 내게 보임으로서 나로 하여금 피해자의 편에 서게 만든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쩄거나 나는 무언가를 배운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는 쓸데 없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나는 내 인생에 걸쳐서 더 큰 악을 배우게 된것 같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내 뇌리에 각인된듯하다. 나는 기억력이 나빠서 곧잘 잊는데, 이 악에 대한 기억은 뇌리에 계속 남아있다. 그리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것 같다. 잊혀지지 않는것일까? 하나님께서 못잊게 하는것일까?

 

여하튼 최근에, 그러니까 저번주 일요일날에 나는 하나님을 더 강하게 믿어보자는 결심을 세웠다. 그래서 QT도 더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좀 프로가 되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든 프로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한다면 좀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진짜 프로는 아니고, 열정을 내어보자는것이다. 나는 열정을 낼 줄을 모르니까 말이다. 도무지 나에게서는 열정이 피어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말이라도 한번 '해보자' 라고 결심해 본다. 일단은 QT를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다면 글 1000자는 채우도록 해봐야겠다. 글을 많이 쓸수록 는다고 하니까 말이다. 나는 글을 좀 잘 써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여하튼 오늘의 qt는 ... 이제는 죄를 짓는 사람이 되지 말것! 그리고 선과 악을 택할때 되도록이면 선을 택할것!

그것들을 결심해 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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