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 46:1 KRV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69:13-15 KRV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린도후서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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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자 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사실 이루어지기 쉽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기 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담대하게 해주는 힘이 되시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힘이 되어주시는 것이다. 문제 해결사, 전능함으로 도우시는 분이 아니라, 심리 상담가 같은 느낌이랄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기적들을 보이시며 사람들을 구하고는 했지만, 현대의 하나님은 기적을 보이시지 않는다. 아니, 세상 어딘가에서는 기적을 행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가뭄이 든 땅을 축축하게 유지시켜주시던가, 병에 걸린 어린 아이를 서서히 낫게 하고 계시던가. 사실 그래, 나는 하나님이 어딘가에서 여전히 기적을 행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프고 약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하지만 우리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길 바라기보단 스스로 해결하거나, 아니면 문제가 우리에게 안겨줄 고통을 이겨내는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고는 한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배신자다. 다 거짓말이다. 하고 외치고는 한다. 나도 안다. 그 간절함을. 세상 속의 풍파에 이기지 못해 금방이라도 쓰러져 휩쓸려갈것만 같은 그 느낌을.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능히 이겨내지 못하는 시련을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 이때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겨내지 못한다는게 아니다. '영혼'적으로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혼이 파괴되어버릴 시련은 하나님은 주시지 않는다. 육신적으로 죽게 되더라도, 정신적으로 미쳐버리더라도 그것은 사람을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 아닌 것이다. 육신적으로라 함은 병에 걸리거나 장애를 갖게 되는 것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할것이며, 부모에게 학대를 당했거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하는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 또한 마찬가지로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한다. 심지어 죽음 조차도,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넘어뜨리는 요인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이 세상은 잠깐 왔다가 떠나는 곳이라고 한다. 물론 이 세상의 시간들도 모두 소중하긴 하다. 그리고 행복해보이는 남을 보면, 그들은 행복한데 나는 왜이렇게 불행한가 하는 불평등에 대한 불만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인간의 삶은 사후세계에 있다. 허무한 삶을 살아가거나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에게 위로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꺾이지 않길 바란다. 어릴적, 교회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길, 이 세상은 전쟁터라고 하셨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승리하려면, 슬픔을 이겨내고 맞서 싸워야 한다.
기독교인은 소망을 갖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할때, 기독교인은 그 너머의 세상을 꿈꾼다. 기독교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진정한 새로운 시작이라고 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사실 고통이 두려울수도 있긴하다. 자살도 살아갈 고통이 싫어서 죽으려는거니까. 나도 사실 죽음보다 고통이 더 두려운 사람으로서 뭐라 말하긴 좀 그렇지만 '죽음'을 진정으로 깊게 생각하다보면 고통이 멀게 느껴지기도 한 것 같다. 나는 명상을 하고는 하는데, 불교 명상이 아닌 마음챙김 명상을 한다. 그 명상을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했는데 '내가 오늘 죽는다면' 하고 생각했더니 내 영혼을 위해서 스스로 고통을 덜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의사가 죽음앞에 선 최악의 고통을 겪고있는 환자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아주듯이. 마음의 고통은 심리적으로 '자학'으로 기인한다고도 하는데 왜냐하면 고통스러운 생각하는것은 자신이니, 그 생각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고통, 즉 자학인 것이다. 트라우마라던가 강박증 같은 경우에는 병이므로 자학에서 예외다. 하여튼 죽음 앞에서는 사람이 관대해 지는 것 같다. 죽음이란 끝을 의미하니까. 아무리 원수라도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 처한 원수는 약간의 동정심이 생긴다. 아무리 최악의 사형수더라도, 사형 집행시에는 약간의 동정심이 생긴다. 죽음은 어쨌거나, 삶을 빼앗기는 것이니까. 생명을 지닌 것에게 죽음은 그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엔, 누구나 숙연해지고 진지해지고 동정심이 든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것이다. 그러나 깊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생각들을 흘려보내고 대신 평온함을 느껴보길 바란다. 부디,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주길. 자신에게 관대해지길. 그리고 마지막 선택을 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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