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7
Numbers 17
민수기 17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역할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나? 근데 왜 미리 그들에게 아론의 지팡이 같은 특별한 계시를 보여줘서 반역에 미리 대비하지않아놓고 반역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 죽여버렸나?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과 하나님의 대응은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드러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의 **전지성(모든 것을 아심)**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깊이 논의될 수 있습니다. 이를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반역을 미리 알고 계셨는가?
-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시편 139:1-4).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 가능성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 민수기 16장에서 고라의 반란이 끝난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며, 하나님께 불만을 표했습니다(민수기 16:41). 이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아셨음을 보여줍니다.
2. 왜 아론의 지팡이 같은 특별한 계시를 미리 주지 않았는가?
1) 인간의 자유와 책임
-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반역을 미리 막기 위해 강제적인 계시를 보여주셨다면,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보다 강압에 의해 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서 미리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2) 계시의 시점
- 아론의 지팡이가 싹을 트는 기적은 반역 이후에 나타났습니다(민수기 17장). 이는 반역 이후에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택과 아론의 직분 정당성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 하나님은 백성들이 반복적으로 반역하고 나서야 명백한 표적을 주셨는데, 이는 그들에게 깊은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3) 백성의 마음과 배움
-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출애굽 과정에서 수많은 기적(홍해 갈라짐,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과 구름기둥 등)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불평과 불신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아론의 지팡이와 같은 기적도 단지 증거의 부족 문제라기보다는, 백성들의 마음의 완고함이 문제였습니다.
3. 왜 반역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셨는가?
1) 하나님의 거룩함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하시기 위해 죄와 반역에 대해 강력히 대처하셨습니다. 백성들의 반역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에 대해 즉각적으로 심판하셨습니다(민수기 16:31-35, 16:49).
2) 경고와 교육
-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처벌이 아니라, 살아남은 백성들에게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아론의 지팡이 사건 이후, 백성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리더십을 더 이상 도전하지 못했습니다(민수기 17:12-13). 이 사건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집단의 죄와 책임
- 고라의 반란을 포함해 백성들의 반역은 개인적인 죄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죄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의 사회 구조에서, 개인의 행위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흔한 사고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의 영향을 제거하고자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
1) 하나님은 잔인하신가?
- 하나님의 심판이 현대인의 윤리적 관점에서 잔인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는 그분의 거룩함과 공의를 드러내는 측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단순히 처벌하기 위해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질서와 거룩함 안에서 살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심판하셨습니다.
2) 용서와 긍휼
-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모든 백성을 멸하지 않으시고, 모세와 아론의 중보를 통해 많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민수기 16:22, 16:46-48).
5. 결론: 하나님의 심판과 교육의 목적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의 심판이나 경고를 넘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해야 함.
- 반역은 공동체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함.
- 하나님의 인도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이를 신뢰해야 함.
따라서 하나님께서 반역을 미리 알고 계셨더라도, 인간에게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과를 감당할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심판과 계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권위와 사랑을 동시에 깨닫게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인간들이 강압적으로 하나님을 따르게 하지 않기 위해 아론의 지팡이 같은 계시도 주지 말았어야하는거 아니야?
아론의 지팡이 사건처럼 특별한 계시는 강압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권위를 확증하기 위한 의도적이고 제한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는 동시에,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의 권위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강력한 표적을 주시고, 어떤 때에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지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해 보겠습니다.
1. 아론의 지팡이 같은 계시는 강압적이었는가?
1) 계시는 교육적 목적을 지님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백성들에게 강제적인 복종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질서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고라의 반란 이후 백성들 사이에는 혼란과 불신이 팽배했습니다. 누가 진정한 지도자인지, 누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인지에 대해 의문이 커졌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아론의 지팡이가 싹을 트는 기적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백한 선택을 보여준 교육적 계시였습니다.
2) 강압과 계시의 차이
- 강압은 자유 의지를 억누르는 행위로, 선택의 여지를 없앱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 즉,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를 제공했을 뿐, 그 증거를 믿고 따를지 말지는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2. 왜 특정 상황에서 계시를 주셨는가?
1) 반역의 심각성
고라의 반란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사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명백한 개입이 필요했습니다.
- 계시는 혼란을 종식시키고,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만약 하나님께서 이 상황에서 아무런 표적도 주지 않으셨다면, 백성들은 계속해서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을 의심하고 더 큰 혼란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2) 계시는 제한적임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제한적으로 계시를 주셨습니다.
- 예를 들어,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리더십의 정당성을 확증하기 위해 주어진 특별한 경우입니다.
-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불평하거나 반역할 때마다 매번 이런 계시가 반복된 것은 아닙니다.
3. 왜 하나님은 항상 계시로 인간을 설득하지 않으셨는가?
1) 믿음의 성숙
-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인간을 설득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발적으로 믿음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 만약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계시를 통해 인간을 설득하셨다면, 인간은 신뢰와 믿음을 스스로 발전시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것과 같은 상황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2) 계시의 한계
- 계시나 기적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출애굽 과정에서 수많은 기적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불신과 반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따라서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완고함이었습니다.
4. 계시와 강압의 균형
1) 계시는 선택의 기회 제공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질서를 분명히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그들이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는 남아 있었습니다.
- 계시는 믿음을 강제하지 않고, 결정의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 이후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권위와 아론의 직분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습니다.
2) 강압적인 계시는 배제
-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믿음과 순종을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강제적인 계시는 인간의 책임을 무효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은 피하셨습니다.
5. 결론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강압적이라기보다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와 선택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 특별한 계시를 주셨지만, 인간이 믿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자유를 항상 존중하셨습니다.
결국, 이러한 계시들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하나님의 주권 사이의 균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따르게 하지 않으시며, 때로는 계시를 통해 교육적이고 구속적인 증거를 주시는 동시에, 최종적인 믿음의 결정을 인간에게 맡기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을까봐 두려워하게 되었잖아. 아론에게 또 대들면 하나님께 죽으니까 그들에게 순종할 수 밖에 없게 된거잖아. 그들은 진심으로 공포에 떨고 있었고 이건 강압적으로 믿게 하는것 같은데, 공포에 의한 강압적인 복종. 그들에게 선택권을 하나님이 주신게 아니야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과 모세를 따르게 된 데에는 공포가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론의 지팡이 사건 이후,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권위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고, 이는 그들이 강압적으로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공포에 의한 복종은 하나님의 목적이었는가?
1) 공포는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주셨던 이유는 단순히 복종을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권위를 이해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역을 일삼았습니다. 이런 반복적인 불신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명확히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 공포는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생긴 결과일 뿐, 하나님이 원하셨던 최종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2) 진정한 순종의 본질
-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외적인 복종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과 사랑에서 비롯된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공포를 통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교육적 과정을 통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따르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는가?
1) 선택의 기회는 주어졌다
- 고라의 반란이나 아론의 지팡이 사건 이전에도 백성들은 여러 번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 출애굽 때 홍해를 가르는 기적
-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을 내리는 사건
- 시내산에서의 율법 수여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자신의 선하심과 권위를 보여준 계시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불신과 반역을 선택했습니다.
2) 공포는 인간의 완고함을 깨뜨리는 도구
- 공포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깨닫게 만드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했습니다. 백성들은 고라의 반란과 같은 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죄와 완고함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순히 공포에 의존해 순종하는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후 율법과 제사 제도를 통해 그들의 신앙과 삶을 깊이 변화시키는 교육적 과정을 이어가셨습니다.
3. 공포와 강압: 하나님의 방식에 모순이 있는가?
1) 강압과 계몽의 균형
- 공포는 일시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도록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 율법은 단순한 규칙의 나열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품(공의와 사랑)을 가르치고, 그들과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2) 공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도구
-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 앞에서 매우 두려운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에 따른 것이며, 인간에게 강압적으로 복종을 요구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 백성들이 공포를 느낀 이유는 그들의 죄와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거룩함과 사랑이기에,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4. 인간의 자유 의지와 하나님의 공포
1) 공포가 자유 의지를 침해했는가?
- 공포는 인간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만, 자유 의지 자체를 없애지는 않습니다. 아론의 지팡이 사건 이후에도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여전히 자유 의지를 허락하셨음을 보여줍니다.
2) 공포는 경외로 변화될 수 있다
-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두려움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그것이 **경외(존경과 사랑의 혼합된 감정)**로 변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 예를 들어, 시편과 같은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외와 감사가 드러납니다. 이는 단순한 공포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위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5. 결론
이스라엘 백성이 공포를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 것은 일시적이고 부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공포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권위를 깨닫게 하는 도구였을 뿐,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궁극적인 복종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며,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신뢰와 사랑을 선택하도록 이끄십니다.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강압적으로 믿음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계기가 되는 교훈적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약간... chatGPT도 한계가 있는것 같다. 분명히 공포로 인한 살육의 정치인데... 신의 인간 살인에 대한 공포가 부수적인 결과였다니.... 이해를 하지를 못하는것 같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모든것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인간으로서의 완고함과 죄성을 이미 알고 계셨을것이다. 그들이 미래에 반역할것도 알고 계실것이다. 물리학계에서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미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에 존재하며 시간이 흐르는것처럼 보이는것은 우리의 의식이 존재하는 방식이 시간이 흐르는것처럼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chatGPT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시간, 시공간, 그리고 미래의 결정론에 대한 질문은 현대 물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주제들입니다. 아래에서 차근차근 설명해드릴게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축(Space-Time)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1905년)과 일반 상대성 이론(1915년)에서 시공간(space-time)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 시공간의 정의:
- 전통적인 뉴턴 역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봤습니다. 시간은 모든 곳에서 동일하게 흐르고, 공간은 무한히 펼쳐진 3차원 좌표라고 여겼죠.
-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결합된 하나의 "4차원 구조"로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시공간이라 부릅니다.
- 3차원 공간(가로, 세로, 높이) + 1차원 시간 = 4차원 시공간
- 시공간 축과 관측자의 차이:
- 관찰자의 움직임(속도)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측정값이 달라집니다. 이를 **시간 지연(time dilation)**과 **길이 수축(length contraction)**이라 부릅니다.
- 예: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더 느리게 흐릅니다. 즉,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뜻이죠.
- 일반 상대성이론과 중력:
- 일반 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을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설명합니다.
- 예: 태양은 주변의 시공간을 휘게 만들고, 이 휘어진 시공간 위를 행성들이 따라 움직이면서 궤도를 형성합니다.
물리학에서의 과거, 현재, 미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구조지만, 물리학적으로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해됩니다.
- 과거와 미래가 '동등하다'는 관점:
-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시공간은 "블록 우주(block universe)"라는 구조로 설명됩니다.
- 블록 우주는 시간(과거, 현재, 미래)이 모두 하나의 고정된 구조로 존재한다고 보는 개념입니다.
- 예: 과거의 사건, 현재의 사건, 미래의 사건은 모두 시공간의 특정 지점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를 느끼는 것은 단지 시공간에서 우리의 위치일 뿐입니다.
-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가? (결정론 vs 비결정론):
- 결정론적 관점: 고전 물리학(뉴턴 역학)과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므로, 과거와 현재가 정해지면 미래도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 비결정론적 관점: 양자역학에서는 사건의 결과가 확률적으로 발생합니다. 즉,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는 100% 예측할 수 없습니다.
- 현대 물리학은 이 두 관점을 종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지는 현재로선 열린 질문입니다.
- 현재란 무엇인가?:
- 물리학적으로는 모든 관찰자가 각자의 "현재"를 느끼는 기준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비행사는 지구에 있는 사람과 "현재"의 정의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를 **동시성의 상대성(relativity of simultaneity)**이라 합니다.
시간은 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까?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듯 보이지만, 물리학적으로는 조금 다릅니다.
- 심리적 시간:
- 시간의 흐름은 우리의 뇌가 경험을 처리하고,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뇌는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인지하며, 이를 통해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게 됩니다.
- 엔트로피와 시간의 화살:
-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무질서의 정도)**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 예: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시간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물리적 원리로, 이를 **시간의 화살(arrow of time)**이라 부릅니다.
- 시간의 흐름은 절대적이지 않다:
-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관찰자의 속도와 중력의 세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즉, 시간이 흐르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요약
-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구조로 봅니다.
- 물리학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시공간의 고정된 구조로 존재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미래가 확률적으로 결정된다고도 합니다.
-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은 우리의 뇌, 엔트로피의 증가, 그리고 상대적인 시간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후속 추천 질문
- [1] 엔트로피와 시간의 방향성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 [2] 양자역학에서 비결정론적인 미래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 [3] 시간 여행이 가능할지 과학적으로 논의되는 이론들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번호를 입력하거나,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시면 됩니다.
양자역학은 확률이다. 그래서 모든것의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천체같은것은 꽤 규칙적으로 움직여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도 거의 마찬가지다. 인간의 사회도 어느 흐름이 있어서 원인과 결과에 영향을 받으며 흘러가고 있다. 나름의 질서가 있는것이다. 양자역학은 아주 작은 미시세계에서의 역학이다. 그러나 거시세계, 우리가 인지하고 보는것들은 대게 고전역학을 따르는 편이다. 미시세계처럼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것이 빛인데 빛이 양자이면서도 파동이라는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위의 다큐에서 나온 지구인과 우주인의 거리 100광년이란 값도 나름 큰 숫자라고 볼 수 있다. (천문학에서 볼때는 그렇게 큰 숫자도 아니겠지만) 뭔가 극단적인것들에게서는 확률이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 개개인도 극단적인 운명을 지닌 사람들은 성패, 모아니면 도가 분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은 인생이 무난하게 흘러갈것이라 본다. 원인과 결과에 지배받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성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들이 반역할것도 알고계셨다. 그러나 그들이 '자유의지'로 순종하도록 내버려두신것은 미래에 변화 가능성이 있다고 보셨기 때문일까? 이미 처음부터 그들이 반역할것을 알고 계셨지만, 미래에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신걸까?
성경에 따르면 미래는 결정되어있지 않는것이다. 양자와 같이 우리 인간들의 미래도 확률적인것이다.
결정론자들은 감정이 무뎌진다고들한다. 미래에 어떻게 될지 확신이 있는자들은 미래를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덤덤하게 그 시간이 오기까지 지낸다. 미래에 사형당할 날짜를 이미 알고있으면 그리고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면, 아예 부정하거나, 아예 덤덤해지는것이다. 죽음에 대한 사람의 감정적 반응 죽음의 5단계도 보면 그렇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시한부 선고나 비슷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겪는 감정적 반응은 흔히 **"죽음의 5단계(5 Stages of Grief)"**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제안한 모델로, 사람이 큰 상실이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겪는 감정 단계를 설명합니다.
다섯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 부정(Denial)
- "이게 나한테 일어날 리 없어."
- 현실을 믿지 않으려 하며 충격과 부정 속에서 보호막을 치는 단계입니다.
- 분노(Anger)
- "왜 하필 나야?"
- 불공평하다는 감정과 분노가 솟아오르고, 타인이나 운명, 심지어 신에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
- 타협(Bargaining)
-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 현실을 바꾸려는 희망으로 신이나 의사, 혹은 운명과 거래하려는 심리가 나타납니다.
- 우울(Depression)
- "이제 아무 소용없어."
- 깊은 슬픔과 상실감, 무기력함을 느끼며 절망에 빠질 수 있는 단계입니다.
- 수용(Acceptance)
- "이제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
- 감정을 정리하고, 상황을 받아들이며 평온을 찾는 단계입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이 단계를 순서대로 거치는 것은 아니며, 어떤 단계는 건너뛰거나 반복되기도 합니다. 개인마다 반응은 다르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에서는 '모든것을 깨닳은자'가 '평온'하다고 가르친다. 참고로 하나님은 모든것을 깨닳다못해 초월하신 분이실 것이다. 그분이 인간의 죄성따위에 분노할것인가? 이미 미래에 반란하는것을 알고도 또 분노할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을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왜 하나님이 분노하는것처럼 보이는가? 왜 그렇게 쓰였는가? 가 질문이 될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관점에서 성경이 쓰였기 때문은 아닌가 한다. 널리 알려진 사실로는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진리를 담고있다고들 한다. 그리고 초월적인 시각도 담겨있을거라고들한다. 그러나 군데군데 인간의 시선에서 쓰여진것들이 보이곤 하는것 같다. 그리고 또한 신약에서도 똑같은 사건을 '다르게' 묘사하거나 아예 사건 자체가 다른경우도 있다. 저자가 다르면 그렇게 되는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성경무오설은 역시 틀리다. 그리고 성경이 반드시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것도 아니다. 성경에도 틀린게 있을 수 있다... 가 되는것 같다.
다만 성경이 진리에 가장 가까운 책임은 분명하다. 성경을 통해서 진리에 가닿을 수 있을것이다. 누구나 말이다.남녀노소 할것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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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일째 Qt 민수기 14장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그러나 반드시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성경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읽어야. (0) | 2024.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