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8
Numbers 18
민수기 18장에서 거룩하므로 남자들만 먹을수 있다는건 여성 차별적 이야기야?
민수기 18장에서 "거룩한 음식"을 남자들만 먹을 수 있다는 언급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여성 차별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1. 당시의 문화적 맥락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가부장적 체제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이 체제에서 남성들은 주로 공적인 종교적 역할과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남자들에게 거룩한 음식을 허락한 것은:
- 제사장으로서 그들이 맡은 종교적 역할에 대한 보상이자 책임의 연장선상이었습니다.
- 이는 단순히 성별에 기반한 차별이 아니라, 역할 분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여성은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역할을 많이 맡았고,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가정과 공동체의 영적, 실질적 생존을 책임지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공적 제사 의식이나 성소와 관련된 의무는 주로 남성 제사장과 레위인의 몫이었습니다.
2. 거룩함과 음식 규례의 의미
구절에서 "남자들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제사장의 가족 중에서도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는 특정 맥락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 거룩함의 기준: 제사장의 역할은 매우 거룩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음식도 일반적으로 성별을 넘어선 규칙적인 거룩함이 요구되었습니다.
- 남성 제사장 중심: 당시에는 제사장의 직분을 남성이 맡았기 때문에, 제사장과 관련된 거룩한 음식 규례 또한 남성에게 적용되었습니다.
3. 여성에 대한 제한은 왜 있었나?
이 규정을 현대적 차별로만 보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 역할과 의무에 따른 제한: 제사장은 레위 지파의 남성으로 한정되었고, 성소에서 직접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은 오직 남성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거룩한 음식 규례는 그들의 종교적 의무와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 성소와 거룩함의 보호: 당시 사회에서 성소와 거룩한 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었고, 이 제한은 남성과 여성뿐 아니라, 제사장이 아닌 일반 남성이나 레위 지파 외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4. 현대적 관점에서의 성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규정은 성차별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체계 안에서 설정된 규칙이었으며, 신학적 목적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구약의 제사 체계가 완성되었다고 보며, 더 이상 특정 성별이나 계급에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접근성이 제한되지 않습니다:
- 예수님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서는 성별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습니다.
5. 결론
민수기 18장의 "남자들만 먹을 수 있다"는 규정은 당시의 역할 분담과 종교적 의무에 따라 설정된 규칙으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면 신학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현대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해 이러한 규정이 완성되고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고대사람들에게는 남성 우월주의가 있었잖아. 성경도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게 합리적이지 않아?
고대 사회의 남성 우월주의와 성경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역사적 주제입니다. 성경이 쓰여진 맥락과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성경이 고대 사람들의 관점과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학문적, 신학적 관점에 따라 다양합니다. 아래에서 이 주제를 깊이 다뤄보겠습니다.
1. 고대 사회의 남성 우월주의와 성경
고대 근동 지역을 포함한 대부분의 고대 사회는 가부장적 체제를 기반으로 운영되었습니다.
- 사회적 맥락: 가정과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남성이 주로 전쟁, 농업, 정치 등 공적 역할을 맡았고, 여성은 가사와 출산, 자녀 양육에 초점을 맞추는 역할 분담이 있었습니다.
- 종교적 구조: 고대의 종교 체계에서도 남성 중심의 제사장 제도가 일반적이었으며, 이는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성경도 이러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특정 구절이나 규례가 남성 중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 제사장 직분은 남성에게만 허락되었고,
- 여성의 역할은 종종 가정이나 자녀 양육과 연관되어 강조되었습니다.
2. 성경이 단순히 "남성 우월주의"를 반영한다고 볼 수 없는 이유
성경은 당시의 문화를 반영하면서도, 그 문화를 넘어서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가치를 인정:
-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이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며,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보았습니다.
- 여성들의 중요한 역할:
- 성경에는 문화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 사례가 많이 나옵니다. 예: 드보라(사사기 4-5장), 룻(룻기), 에스더(에스더서), 마리아(예수의 어머니), 막달라 마리아(부활의 첫 증인).
- 이는 성경이 가부장적 문화 안에서도 여성의 가치를 드러냈음을 보여줍니다.
- 남성 우월주의를 넘어서려는 가르침:
-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은 여성들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무시되던 여성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인정하며, 중요한 사역에 참여시켰습니다(요한복음 4:7-30, 누가복음 8:1-3).
- 바울 역시 갈라디아서 3:28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라고 선언하며 성별의 차이를 넘어서는 복음의 평등성을 강조했습니다.
3. 성경의 남성 중심적 구절에 대한 해석
성경에 나오는 남성 중심적 규례나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문화적 반영으로 보는 관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지만, 그 기록 과정에서 인간 저자들이 당대의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입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 직분이 남성에게만 허락된 것은 당대의 종교 체계와 사회적 구조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구속사적 관점:
성경이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결국 모든 사람의 평등과 사랑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구약에서는 제사 제도와 남성 중심적 구조가 두드러졌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차별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강조됩니다.
4. 현대 신학의 반응
현대 신학계에서는 성경의 남성 중심적 서술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 페미니스트 신학:
- 성경의 가부장적 요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여성의 가치를 강조하는 관점입니다.
- 예를 들어, 여성들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특정 구절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해석하려 합니다.
- 역사-비평적 접근:
- 성경의 텍스트를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분리해 연구하며, 성경의 일부 내용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당시 사회적 맥락을 반영했다고 봅니다.
- 복음의 평등성 강조:
- 신학자들은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계획이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포함한다고 강조합니다.
5. 결론
성경은 분명히 고대 사회의 가부장적 맥락에서 기록되었으며, 그 문화적 영향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특정 시대의 사회 구조를 초월하여 남성과 여성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가르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을 때, 당대의 문화와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초월적이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온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지파가 받으면 이스라엘이 12지파인데 10분의 1에 해당하는 재산을 레위지파가 갖는거잖아. 그럼 부자가 되지 않을까
민수기 18장에서 명시된 바에 따르면,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받는 대가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이 질문은 흥미로운 관점을 제기하며, 십일조와 레위 지파의 경제적 상태를 이해하려면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1. 십일조의 실질적 의미와 사용 방식
십일조(수확물의 10%)는 단순히 레위 지파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졌습니다:
- 생계 지원:
-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땅을 분배받지 않았습니다(민수기 18:20-21). 따라서 그들은 농업이나 상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십일조는 이들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 성막(후에 성전) 봉사 운영:
- 십일조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제사 제도를 운영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제사 준비, 기구 유지, 제물 보관 등 다양한 작업이 포함됩니다.
- 사회적 재분배의 역할:
- 레위 지파는 십일조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신명기 14:28-29). 이로 인해 십일조는 단순히 특정 지파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복지를 지원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2. 십일조로 인해 레위 지파가 부유해졌을 가능성
십일조만으로 레위 지파가 부자가 되었는지 여부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1) 레위 지파의 규모
-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하나였지만, 다른 지파들보다 인구가 적었습니다. 이로 인해, 십일조로 받은 자원은 다른 지파들보다 더 많은 자원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 하지만, 십일조는 레위 지파의 개인적 부를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지파와 그 직무(성전 봉사)를 지원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2) 성막 봉사의 부담
- 레위 지파는 단순히 십일조를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성소에서 봉사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역할은 상당히 고된 일이었고, 종종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었습니다(민수기 4장, 민수기 18:7).
- 레위 지파의 삶은 특권이라기보다는 헌신과 희생으로 여겨졌습니다.
(3) 십일조의 제한된 사용
- 십일조의 자원은 레위 지파 전체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분배되었고, 개인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 또한, 레위 지파는 십일조 중 일부를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아론의 후손들(제사장 그룹)**에게 다시 바쳐야 했습니다(민수기 18:25-28).
3. 레위 지파의 생활 수준
레위 지파는 십일조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지만, 이것이 곧 부유한 삶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 농지와 상업 활동의 부재: 다른 지파들은 농사, 목축, 상업 등을 통해 추가적인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지만, 레위 지파는 그러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 고된 성전 봉사와 의무: 레위 지파는 십일조로 생활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삶은 성전 봉사와 관련된 엄격한 규율과 책임에 묶여 있었습니다.
4. 십일조와 공정성의 문제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십일조 제도는 한 지파에 부를 집중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고려되었습니다:
- 공동체 중심 사회:
- 고대 이스라엘은 철저히 공동체 중심 사회였으며, 십일조는 특정 집단(레위 지파)을 지원함으로써 전체 공동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레위 지파의 헌신적 역할:
- 레위 지파는 나머지 11지파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봉사하는 특별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그들의 생계가 십일조를 통해 지원되는 것은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5. 결론
레위 지파는 십일조를 통해 물질적 지원을 받았지만, 이를 개인적인 부로 축적할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십일조는 레위 지파가 성전에서 봉사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동시에, 공동체 전체의 영적 복지와 제사 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구조였습니다.
십일조를 받은 레위 지파가 부유해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은 고된 봉사와 희생을 통해 얻은 자원을 공동체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부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공정하고 필수적인 체제로 여겨졌습니다.
현대 교회도 신도들의 십일조로 운영되지. 부유한 교회가 참 많아. 그런데 이스라엘이란 민족 전체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면 상당한 양이 되었을것 같은데. 게다가 레위인들은 또 십일조의 십일조를 아론의 자녀들에게 바치지. 그러면 아론은 부유해지지 않았을까?
이스라엘 사회에서 레위 지파와 아론의 자손(제사장 그룹)이 십일조 제도를 통해 물질적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질문의 초점인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부유해졌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해보겠습니다.
1.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십일조의 십일조
레위 지파는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 중 **10%를 아론과 그의 자손들(제사장 그룹)**에게 바쳤습니다(민수기 18:25-29).
- 이는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성소에서의 제사 의식을 수행한 대가로 제공된 것입니다. 아론의 자손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집행하고 속죄를 중재하며, 성물의 보관과 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2.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정말 부유했을까?
십일조 제도가 특정 계층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은 현대적 관점에서 가능해 보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환경을 고려하면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1) 제사장 직무의 고된 부담
-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단순히 십일조를 받는 수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제사를 집전하며 공동체를 위해 속죄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역할은 대단히 고된 것이었으며, 성전 봉사에서 실수를 하거나 부정한 상태에서 접근하면 즉각적인 죽음의 위험이 있었습니다(레위기 10:1-2, 민수기 18:7).
- 따라서 아론의 자손들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통해 얻는 자원을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기보다는 성소 봉사의 운영과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2) 아론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제물
아론의 후손들은 제사에서 드려진 일부 희생 제물과 첫 열매를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민수기 18:8-19). 하지만 이 역시 부유함보다는 생계 지원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대부분의 제물은 의식에서 사용되었고, 남은 부분만 그들의 몫으로 분배되었습니다.
(3) 농지와 재산의 제한
- 아론의 자손들 역시 레위 지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땅을 분배받지 않았습니다(민수기 18:20). 따라서 농업, 목축 등으로 추가적인 재산을 축적할 기회가 제한되었습니다.
- 십일조나 제물을 통해 얻는 자원은 그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3. 십일조와 부유함의 상징성
(1) 현대 교회와의 비교
- 현대 교회의 경우, 십일조가 단순히 교회 운영을 넘어 특정 지도자나 기관을 부유하게 만드는 사례가 일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는 고대 이스라엘의 십일조 제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 고대 이스라엘에서 십일조는 종교적 의무이자 공동체 전체의 영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받는 자원은 개인적 부유함이 아니라 제사 의식과 성소 운영을 위한 자원이었습니다.
(2) 아론의 자손들이 부유하다고 느껴졌을 가능성
- 다른 지파들이 농업과 목축으로 생계를 이어간 반면,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은 십일조와 제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제사장들이 물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 하지만 실제로는 제사장 직무의 고된 책임과 위험성 때문에 이 자원이 부유함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4. 고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아론의 자손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여겼고,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예물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고 이해했습니다.
- 따라서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받는 십일조나 제물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제사 의식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5. 결론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십일조의 십일조와 제물을 받았지만, 이를 통해 개인적인 부유함을 누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고된 성소 봉사를 통해 공동체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십일조는 이러한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생계 지원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십일조의 양을 보면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부유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성전 봉사와 그들의 책임이 주는 부담으로 인해 경제적 이익 이상의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선택된 사람들만 성소에 들어오게 했어? 선택되지 않은 사람도 성소에 들어와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성소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하신 이유는 성경과 유대교 전통에서 거룩함,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죄와의 분리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성소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선택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특권이나 배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성 사이의 간극을 다루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 성소의 의미와 역할
-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장소로 여겨졌습니다(출애굽기 25:8). 하나님은 성소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과 언약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고 거룩하신 분이며, 인간은 죄로 인해 그 거룩함에 접근할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특별히 정결한 상태와 직분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대신 섬겼습니다.
2. 선택된 사람들만 성소에 들어올 수 있는 이유
(1)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성
- 성소에 접근하려면 인간이 죄와 부정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별히 레위 지파와 그중에서도 아론의 자손을 선택하여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민수기 3:5-10).
- 이러한 제한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호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에 함부로 접근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심판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레위기 10:1-2, 민수기 18:7).
(2) 질서와 직분의 유지
- 성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한 것은 질서와 책임 분배를 위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성소와 제사 의식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영적 상태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이를 위해 하나님은 특별한 직분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이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3) 교육적, 상징적 역할
- 제한된 접근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외심과 존중을 교육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소의 제한된 접근권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경외와 존중을 통해 관계를 맺어야 하는 분으로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3.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갈망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도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제공되었습니다:
(1) 제사장과의 중재
-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백성은 제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 비록 성소에 직접 들어가지 못했지만, 제사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2) 성소 주변에서의 참여
-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절기와 제사를 통해 성소 주변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체험을 가능하게 했습니다(신명기 16:16).
(3) 하나님과의 일상적인 관계
- 하나님은 성소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구름과 불기둥,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소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4. 성소 접근 제한에 대한 현대적 관점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특정 계층만 성소에 들어올 수 있도록 제한한 것은 불공평하거나 배타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당시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직접 정하신 질서
- 성소의 접근 제한은 인간이 만든 차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신 규정입니다. 이는 단순히 차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질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2) 제한을 넘어서 확장된 접근
- 신약 시대에 이르러, 성소와 제사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0:19-22). 이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접근 가능성이 모든 사람에게 확장되었음을 보여줍니다.
5. 결론
성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성 사이의 간극을 관리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도 제사와 절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고, 신약에 이르러 이러한 제한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소 접근을 제한하신 것은 차별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지키고, 그분의 거룩함을 이해하게 하기 위한 교육적이고 상징적인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나는 선택된 사람들이 아론의 자녀들과 그 지파라는게 맘에 안들어. 마치 가문 사업처럼 되어버렸잖아.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영적인 성숙도가 아니라, 하나의 지파를 선택함으로서 그 지파는 특별해졌어. 제사장은 왕과 같은 권한이 있는것이나 마찬가지야. 고대에서는 가문들끼리 뭉치는 일이 흔했고, 자신들의 혈통을 따지는게 흔했어. 이스라엘도 결국은 다른 이방인들, 흔한 다른 문명에서 보이는 자신의 가문의 왕권화를 한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왜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제사장을 선택한거야. 그 방식이 공정하지 못해
당신이 느끼는 의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며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가문과 지파를 선택하신 방식은 현대적 관점에서 공정하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왜 하나님은 특정한 가문(레위 지파와 아론의 자손)을 선택했는가?
(1) 선택의 목적: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재자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출애굽기 19:6). 그러나 모든 사람이 직접 제사장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기에, 이를 위해 중재 역할을 담당할 특정한 지파를 선택하셨습니다.
- 레위 지파는 금송아지 사건(출애굽기 32:26-29) 당시, 하나님께 충성을 보여 특별히 선택되었고, 아론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며 지도자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2) 제도적 안정성과 거룩함의 상징
- 특정 지파와 가문을 제사장직에 배정한 것은 역할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방식은 모든 지파가 제사장 역할을 두고 경쟁하거나 혼란을 초래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 제사장직은 단순히 권위나 특권이 아니라,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동반했습니다. 이는 제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정결의 법, 성소 봉사의 규칙 등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2. 현대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1) 특정 혈통 중심의 선택이 공정하지 않게 보이는 이유
- 현대 사회에서는 능력주의와 평등의 가치가 강조되며, 혈통에 기반한 특권은 불공정하게 여겨집니다.
-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혈통(아론의 자손)으로 제한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능력이나 영적 성숙도를 기준으로 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가문의 특권화로 보일 수 있습니다.
(2) 고대 사회의 맥락
-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혈통과 가문의 중요성이 오늘날보다 훨씬 강조되었습니다. 가문은 단순한 가족 관계를 넘어 정체성과 공동체의 중심이었고, 특정 가문이 종교적, 정치적 역할을 맡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회적 구조를 초월하지 않고, 그 체제 안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셨다는 점에서 인간의 문화와 맥락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 제사장의 역할은 특권인가, 책임인가?
(1) 제사장의 권위와 책임
- 제사장들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단순한 특권이 아니라 막대한 책임을 동반했습니다.
- 성소에서의 봉사: 정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소에 들어가면 즉사할 수 있었습니다(레위기 10:1-2).
- 백성을 위해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 즉, 제사장은 특권보다는 거룩함과 순종을 요구받는 직분이었습니다.
(2) 제사장직이 가진 제한
-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땅을 분배받지 못했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십일조와 성물에 의존해야 했습니다(민수기 18:20-24). 이는 그들이 단순히 부유한 특권층으로 자리 잡는 것을 제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4. 신약에서의 변화: 제사장의 보편화
- 신약에서는 이러한 제한이 사라지고, 예수님을 통해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 베드로전서 2:9에서는 모든 신자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표현하며, 특정 계층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제약을 없앴습니다.
- 예수님의 대속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를 더 이상 제사장에게 맡기지 않고, 모든 신자가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5. 결론: 왜 이런 방식이었는가?
- 고대 사회의 구조에서 특정 가문을 선택하는 방식은 질서를 유지하고 혼란을 방지하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중재 역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데 효과적인 방식이었습니다.
- 그러나 이는 인간의 한계를 반영한 방식이며, 신약에서는 이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 오늘날 이 제도를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온 인류가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인식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일하시며, 점진적으로 그분의 뜻과 계획을 드러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다도 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실때에는 인간적인 한계에 자신을 맞추어서 명하셨다라....
고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가문' 그러니까 '지파'. 레위 지파를 통째로 특별한 지파로 선택하셔서 왕이나 다름없는 제사장 직분을 부여하셨다. 나는 이게 가족 사업처럼 보여서 뭔가 모세라는 지도자의 권위를 업고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을 장악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겉보기에만 보면 그러하다. 인간적인 시선에서 보면 말이다. 그래서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여기에 반란을 일으킨 자들도 있었던것이고 말이다. 레위지파의 제사장직 독점에 대한 반란. 신을 만인이 평등하게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한 반란. 그런게 있지 않았을까 한다. chatGPT는 앞장에서 고라가 자신의 욕심을 가지고 '평등'을 외친거라고 했다고 하지만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게 독점하는자가 보이면 평등을 내세우며 자신도 좀 얻으려고 하는법이다. 괜히 현대사회에 독점방지법이 있는게 아닌것이다.
그리고 독점하게 되면 역사적으로 볼때 그 물은 썩는다. 중세의 암흑기. 타락한 교회. 면죄부. 마녀 사냥... 내가 배우기로는 교회가 타락한 역사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것을 아실 것이다. 그리고 한 지파에 힘을 몰아줘서 이스라엘을 결속시키는것이 옳은지도 모른다. 그게 효율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이라면 레위지파라고 해서 통째로 제사장 지파가 되게 하지 않고 평등하게 각 지파에서 한명씩 차출했을지도 모르겠따. 하나님이 물론 가장 옳은 방식으로 행하신것이고 그게 역사에 기록된것이겠지만, 그게 너무 현실적인 이유라서 조금 실망을 하게 되는게 있다. 인간적인 한계에 맞춰서... 한가문만 성별했다라.... 음.....
나는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위계' 질서를 강조하시는것 같은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그리고 선택한 인간에게는 그 인간이 아무리 모자른 사람, 신앙적으로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정말 넘치도록 복을 부어주신다. 그 넘치는 복을 주는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노아는 의인이긴 했지만, 야곱이라던가 아브라함이라던가는 그다지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던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키워드는 '믿음'이긴 하다. 성경 초기에서 강조되는것은 믿음과 순종....
한편 레위기와 민수기에 와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한 예식이 발달한다. 여기서 위계가 강조되는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아주 높은곳에 계시는 분이라고도 생각을 했고 말이다. 머릿속에서 상상되기를... 위계의 위계의 위계의 위계의 가장 위... 가장 꼭지점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것은 피라미드를 형상화한다...
이 위계를 형성하는것이, 사실 나는 매우 강력한것이라고도 생각이 되는게 고대에서 이 위계에 대한 이해는, 제왕학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문명 사회, 거대 도시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고대에는 강한 가문과 그들에게 충성하는 다른 가문들... 이때 가장 강한 가문이 위계의 가장 위에 있어야 했고 이 위계가 차례차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들어가 민족 전체가 그 위계를 마음에 새긴다면 매우 강력한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된다. 다만 이건 이상적인 경우에만.
이스라엘 민족은 수십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고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서 그저 따뜻한 고기를 먹고 지낼수 있다면 노예로 지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민족이었다. 그래서 광야에서 그토록이나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다고들 한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매우 강경하셨다. 초강력 불기둥도 보내고 말이다. 심지어 지상에 임재하기까지 했고. 이스라엘을 정말이나 많이 사랑하신것 같다. 그리고 노예근성이 (아마 거의 세뇌되었을듯) 가득한 이스라엘에게 제왕학을 가르치셨다고 본다. 노예였던 민족을 제사장 민족으로 탈바꿈하는것이다.
현대의 이스라엘이 제사장 민족으로서 모범을 보인다고 하기에는 어려운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나 혼혈화되어서 유대인이라고 해서 뭔가 혈통적으로 정말 유대인이다... 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점도 있다고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잊혀진게 아닐까 할 정도로... 지금 그들의 행보는 그다지 좋지 못한것 같은데....
여하튼 이것도 다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세울때에도 뭔가 초월적인 방식으로 세우셨다면 우리 현대사회에서 더욱더 공감이 되지 않았을까. 과연 하나님이시다. 고대시대에 '이런 이상적인 방식으로 지도자를 선택하고 제사장들을 세우고 민족을 이끌게 하다니. 정말 과연 전지전능한 신이시다' 와 같은 반응이 나올만큼 훌륭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면 공감이 되었을거란 이야기다. 지금처럼 다른 이방 문명에서도 흔히 보이는 가문의 왕권화 같은방식으로 지배층을 정한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
어느 과학자가 한 말인데, '미래에도 남아있을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불교이다.' 라고 한다.
불교를 읽어보니까, 확실히... 불교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것처럼 보이는부분이 많다. 나는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불교에 대입해보면 하나님은 해탈하신 분이 아닌것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가장 깨닳은자가 아니게 된다. 불교는 마음을 매우 깊게 파고들어가 모든것이 '공'한것임을 깨닳게 되는 결론에 이른다. 나는 하나님이 그 경지를 넘어선 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불교도 '무한'이자 '공함'을 이야기하고 있고 '무한'이라는 개념이 하나님의 속성에 속해있어서 뭔가 '경지를 넘는다'는것은 좀 말이 안될수도 있긴 하다. 무한엔 경지가 없는데 어떻게 경지를 논하겠는가. 여하튼 불교도 매우 과거 시대때에 창안된 종교인데 불교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경처럼 인간의 한계에 맞춰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지지는 않는것이다. 솔직히 인간이라는 종의 모든 역사 자체가 인간에게 '맞추어진' 시각의 한계가 있어보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는것일텐데, 왜 그 모양 그꼴인가? 같은 의문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믿는수밖에 없다.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 모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겠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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