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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version 묵상

240507 QT 나는 걱정덩어리

by one_soul 2024.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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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우리는 마치 하찮은 걱정과 불안 그리고 상상으로 만든 당혹스러움을 가진 모기떼처럼 비춰질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주시려 했던 하나님과 함께하는 근본적인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은밀한 쉼을 가능케 합니다. 주님 안에서는 과거로부터의, 미래를 위한 그리고 오늘을 위한 안전함이 있습니다. 그 진실은 하나님께서 늘 소유하셨던 흔들림 없는 평안을 주셨습니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도시를 구축하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충분한 시간을 주시기만 하면, 거룩한 도시, 공동체 그리고 지구의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길이 유일한 길임을 인간이 깨달을 때까지 충분한 시도를 해보라고 허용하셨습니다.

묵상 질문: 내 마음 속 어떤 걱정과 불안이 평안한 삶을 무너뜨리고 있나요? 어떠한 사회나 시스템이 주님과 함께하는 평안한 삶의 필요성을 최소화하고 있나요?

'성서적 윤리'와 '최상의 선' (Biblical Ethics and The Highest Good, © Discovery House Publishers) 에서 인용했습니다.

 

 

 

We must be like a plague of mosquitoes to the Almighty with our fussy little worries and anxieties, and the perplexities we imagine, all because we won’t get into the elemental life with God which Jesus came to give. “His love in times past” should enable us to rest confidentially in Him. There is security from yesterday, security for tomorrow, and security for today. It was this knowledge that gave our Lord the imperturbable peace He always had. Communities are man’s attempt at building up the city of God; man is confident that if only God will give him time enough he will build not only a holy city, but a holy community and establish peace on earth, and God is allowing him ample opportunity to try, until he is satisfied that God’s way is the only way. Reflection Questions: What worries and anxieties do I indulge in that reveal my lack of peace? What societies and systems do we build to minimize our need for peace with God? Quotations taken from Biblical Ethics and The Highest Good, © Discovery House Publishers

 

 

 

요한1서 5

15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들은 우리가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Reflection Questions: What worries and anxieties do I indulge in that reveal my lack of peace? What societies and systems do we build to minimize our need for peace with God?

 

 

번역투라서 잘 감이 안와서 영어를 가져왔다. 앞으로도 영어를 가져와야겠다

 

나는 걱정이 많아서 그냥 나 자체가 걱정 덩어리라 내가 뭔가 스스로 훑어볼 필요도 없는것 같다. 그냥 나 자체가 걱정덩어리인듯 하다. 그런데 사실 약간 해탈되어서 이제는 조금 이완된 마음 상태도 번갈아 나타나는 중이다. 내 생각에는 불교가 사실 도움이 많이 되었다. 불교는 이완된 마음 상태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가르쳐주는 것 같다. 사실 내가 존경하는 분께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실 다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걸 듣고 나도 종교는 사실 다 같지 않을까? 생각해보았고 그리고 어딘가 다 비슷한걸  추구하고 있긴 하다는것도 깨닳았다. 성경은 모든것을 담은 책은 아니다. 성경이 구원받기에 충분한 만큼의 지식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것을 다 담지는 않았다. 그 부족한 부분들은 다른 종교가 제시해주고 있는것은 아닐까. 현대 인류에게 주어진 공통의 언어, 과학은 과거 종교들에서 심리학부분으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것으로 알고있다. 특히 불교는 심리학계에서 많이 인정받는데, 어떤 유명 작가는 미래에 살아남을 종교가 있다면 불교가 유일할 것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더 깊게 생각해봤는데, 불교도 모든것을 담고 있는 종교가 아니며, 믿는자로 하여금 행실에 있어서 기독교와 다른것을 추구하는것 같다. 불교도는 과학자도 예술가도 될 수 는 있겠지만, 그들이 만든 산물에 대해서는 '공'하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을 주면 그것은 선한것이라고는 하겠지만 공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깨닳음이 중요하므로 수행에 힘쓸것이다. 내가 볼때 스님들은 절에서 수행을 주로 하지 봉사활동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는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를 보면, 기독교인도 과학자도 예술가도 될 수 있는데 그들은 그 산물보고 공하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비밀을 발굴해낸것에 기뻐한다.(자신의 과학적 발견을 공하다고 생각하는것과 그 발견에 감사하는것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일반 기독교인이 아닌 목사님들은 될 수 있는 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한다.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들은 직책을 맡으면 하는 일이 대부분 기독교의 전파와 자원봉사이다. 스님들은 수행을 주로 하지만 기독교는 자신의 수행보다는 지식의 전파와 봉사활동이다. 그 부분이 나는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고 느껴진다.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스님들이 자기 자신의 일, 해탈을 최우선으로 하고 이 세상에 퍼져있는 악은 구하려 하지 않는다고도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내가 불교를 잘 몰라서 그런 생각이 드는것이다. 근데 스님들이 다 나와서 수행보다 자원봉사에 더 많이 지원하면 세상이 더 좋아질거란 생각은 든다. 이미 하고 있을까? 나는 이쪽 계열은 잘 몰라서 말이다.

 

여하튼 말이 샜고, 나는 걱정 덩어리라 하나님에게 기도를 많이 해야하는데 기도를 등한시해서 좀 죄책감이 든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 같기는 하다. 그것에 감사드린다. 어쩌면 그게 축복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고 계신다는게 얼마나 축복인지를 잊고는 하는 것 같다. 전능한 신께서 하찮고 미천한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니. 그것은 정말 감동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까지 인정해주시니까 말이다. 그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다. 사실 나는 나만 하나님의 자녀이고 싶기도 하지만.

여하튼 나는 내가 걱정의 화신이라는것을 알았고, 될 수 있는한 이제는 좀 즐겨보려고 노력해야겠다. 요즘 읽고 있는 신비주의 책이 있는데(분명한 이교도 책) 거기서 우리 사람은 좀 이완되어야 한다고 써있었다. 나는 거기에 동감한다. 이렇게 신비주의 책, 다른 종교의 지혜서를 보면 기독교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마음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 쉽게 나와있는것 같다. 그렇다고 성경에서 그걸 다루지 않은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은 성령을 감화받은 사람이 읽으면 모든게 이해되게 쓰여져 있어서 나같이 바보같은 사람은 잘 이해가 안되는것으로 알고 있다. ㅠㅠ. 근데 신비주의 책을 보면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알기 쉽게 풀어 쓴게 많더라. 그래. 오늘 QT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평안하라고 하시는데, 이는 신비주의 책에서 우리가 '이완되어있어야한다'랑 비슷한 말이다. 비슷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성경이 더 많은것을 내포하겠지만.

 

한편 두번째 질문....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최소화 하게 하는 사회? 이게 무슨 말인지 영어로 봐도 잘 감이 안오는데, 시간이 늦었으므로 대충 이해하자면, 하나님의 도움을 최소화 할 만큼 좋은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만들었는가? 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사회를 잘 구축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도움을 바랄일이 적어질 것이다. 가난이 사라진 사회, 범죄가 없는 사회, 모두가 부유한 사회 같은것 말이다. 

내 생각에, 한 10년 전부터 사회는 급격이 뭔가 방향을 틀었다는 느낌이 든다. 예술쪽에서도 방향을 급하게 틀었는데, 그것은 '모범적'인 아름다움. 도덕적인 아름다움. 그런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함에서 변혁하여 개성의 아름다움, 다양성의 아름다움, 평범함의 아름다움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느낌이 든다. 사회의 도덕률도 그렇게 갑자기 변한게 느껴진다. 아니면 내가 보는눈이 달라진것일까. 그건 아닌것 같다.

평범함과,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시대. 그럼으로서 환상에서 벗어나, 심각한 주제에 눈돌리게 하는 것... 솔직히 나는 그게 마냥 좋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우리 사람들은 위에서 말했다시피 좀 이완되어서 살아야 할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변화의 급류와 혼란의 소용돌이에 우리는 휩쓸려서 자신의 무게에 의해 익사할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 '시대정신'은 지금 갑자기 목표를 잃은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것은 왜일까. 이전엔 뭔가 통일되고 합치된 것이 존재하는 듯 했다. 그런데 요즘은 자극적인것, 일시적인것들, 쾌락적인것들로 넘쳐나고 있는 것 같다. 무언가 고심해서 아름다운 것을 고안하는 것도 없고, 어떤 사회를 만드는 일도 오로지 돈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그것이 어째 사람들을 더 풍요롭게 하기 보다는 '생존'의 문제가 되게 하는 것 같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지식은 늘어서 이제 누구든 도전만 할 용기가 있다면 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진 것 같지만, 그 용기를 내는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전문직이 아니면 일반 사람이 성공하려면 사업을 하는게 보통일텐데, 사업의 성공률은 낮은편이고. 

난 지금 우리 사회가 갑자기 단기적인 계획만 노린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그리고 새로이 창조하는 것은 적어지고 과거의 것을 계속 재활용하면서 이리저리 파편적으로 조합하고만 있다는 느낌도 있다. 그놈의 개성이 중요하답시고 제멋대로 누더기처럼 기워진 예술작품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그놈의 개성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개성을 왜 과시하는것일까. 개성은 아름다운것이긴 하지만 과시할만한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그리고 과시, 오만, 자만은 아름답지도 않다. 예술적이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다. 

이건 어쩌면 내가 어른이 되어서 그렇게 보는 눈이 바뀐것인지도 모르겠다. 

약간 사회에 환멸이 나는건 어쩔 수 없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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