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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version 묵상

240512 QT 세상의 불평등

by one_soul 2024.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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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죽어가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설교하지만, 그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우리가 전하는 거듭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들은 세상의 쾌락으로 불행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은 매력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죄의 확신에 구겨지는 것 외에, 인간은 자신을 완벽하게 행복하고 평화롭게 유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확신은 성령님이 들어오시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곧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묵상 질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이들을 위해 나는 어떤 평안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가? 왜 복음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분에 대한 필요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가?

'성경적 도덕' (Biblical Ethics, © Discovery House Publishers) 에서 인용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

17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18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묵상 질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이들을 위해 나는 어떤 평안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가? 왜 복음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분에 대한 필요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악한 사람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와 명예 권능을 주시는가?

그들이 부강한것은 왜일까? 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평생토록 행복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사실 우리가 그냥 넘어가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자들에게 하나님께 구하는것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 주시는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에 대해서는 안나와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있는동안은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부자와 거지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가고 거지는 거지로 죽어서 천국에서 편안히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부자와 거지
19“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22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23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24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25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26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27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29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30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31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근데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부자들을 '내버려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회심하게 하지 않으시는걸까...
그렇다면 정말 운명이라는게 있는것일까. 사람들은 이미 그 예정된 길이 정해져 있어서 어떤자는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자는 지옥에 가는 운명을 겪는것일까?
 
만약 운명이 결정되어있다면 종교의 이야기는 가난한 자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위로를 받는다. 더더욱 하나님에게 의지한다. 이 삶에서는 부자들보다 못한 삶을 살아도 천국에서 보상받을것임을 믿으며 삶에 만족한다. 그런데 혹시 종교적 믿음때문에 소시민들이 부당하게 대우받더라도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면서 기득권층에게 이용만 당하고 있는 실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지옥으로 가기로 예정된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만약 부당하게 신자들을 대한다면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견뎌낼 수 있다. 그리고 이세상에 운명이 결정되어있다면 이 땅에서 우리 사람들은 어쩌면 뭔가 고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이 땅에서 무언가 해야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이 땅을 거쳐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난한 믿는자들은 부유하고 막강한 불신자들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믿는자 중에 강하고 부유한 자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들은 자신의 부를 가난한자들을 위해서 써야 할 것 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도와야한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을 위해 부를 나눠주다보면 자신의 힘도 나약해질 수도 있다. 그럼 믿는자들 중 부유한 자들은 약해질 수 있다. 그러니 만일을 위해서 믿는자들은 자신을 막강하게 하기 위해서 돈을 가난한자들에게 안주어도 된다. 대신 자신의 힘을 유지하고 훗날 혹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힘이 쓰일 수 있게 해야한다.
 

인생이 행복해서 하나님이 필요없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정말 불행한 이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로 시련을 주지 않아서 그들이 돌아서지 않게 하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보고 그 원만하고 행복한 인생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솔직히, 그들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오히려 불쌍한 사람이야 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불교에서는 '그 사람이 그가 가진 것을 잃지 않기를' 하는 자애 명상이 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생각해라,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이 있다, 너는 불쌍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것은 상처 한번 받지 않고 온전하게 인생의 꽃을 피우며 사는 사람에게는 뚱딴지 같은 소리일것이다. 예컨대 순수하고 죄없이 행복한 어린아이에게 너 하나님 안믿으면 지옥가, 라고 이야기하는것은 그 아이를 겁먹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세뇌나 마찬가지다. 겁으로 협박을 주어서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인 것이다. 그런데 전도라는것을, 하나님을 믿게 하는 방법이 그런 협박이어서 되겠는가. 그것과 같아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으며 한번뿐인 인생 멋지게 사는게 목표이다. 그들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지옥에 떨어질거야 라고 말하면서 협박하는것은 옳지 않아보인다. 이 세상에서의 삶만이 끝이 아니다라는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믿음을 보내주셔야 그 믿음이 마음에 있을텐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시지 않는다면, 그 불신자에게 당신은 지옥에 떨어질거야 라고 말하는것은 그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일일 뿐이지 않을까. 사실 종교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넣어주셔야 한다.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는 것이다. 근데 하나님께서 넣어주시지 않으셔놓고 그 사람을 탓하는것은 왜일까. 

 

진부하지만 널리 알려진 질문이 있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아 지금의 그 사람이 되었을까, 혹은 자유의지로 지금의 그 사람이 되었을까. 정답은 둘 다이다. 어떤 사람이 종교적인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의 환경과 자유의지 둘 다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자유의지는 또 무엇일까. 환경은 부유하다면 자유의지가 어떻게 작용해야하는것일까. 최근 연구에서는 자유의지마저도 착각이라는 가설이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 이미 우리 뇌는 결정을 내린 상태란 뜻이다. 그것은 우리 무의식이 정한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무의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믿음이 없어도 억지로 교회를 나가고 성경말씀을 외어서 무의식을 바꿔서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그럼 믿음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다 억지로 시작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감화되거나 마음속에 저절로 믿음이 생겨나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왜 어느사람에게는 믿음을 넣어주고 어느사람에게는 믿음을 넣어주지 않는가.

그리고 왜 사람들에게 충분히 하나님을 믿게 할 만큼 시련을 주지 않으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들이 믿음을 부여받을 것 같다

우리는 모르는 하나님만의 기준이 있는것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고통을 한번씩은 다 당하고 그 고통으로 인해 신을 찾게 되는 순간이 평등하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니까 말이다. 부유한 사람들도 다들 고통이 있다. 그런데 어떤 부유한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이 되지 못한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욕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고 계신다. 분명 부유하고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은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고, 풍족하여 욕망을 따라 살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삶을 바치기 쉽지 않다. 

믿는자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려두고 계신것 같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도 다 평등하게 기회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루시퍼처럼 자만하기 쉬워서 쉽사리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

 

부유함의 반대편에는 버려진 사람들이 있다. 버려진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하고 괴롭기에 또 하나님을 믿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자들을 보면 또 이것도 불평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생에서의 삶도 가난하고 질병에 들어있는데 천국까지 가지 못한다니. 왜 그런 불평등이 있는것인걸까? 한번 고민해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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